[한나절 여행] 가락국 마지막 임금이 묻힌 돌무덤 산청 구형왕릉를 찾아서

하늘 보기 미안했다. 겨울이라고 그냥 창 너머로 저 맑고 푸른 하늘을 보기에는 미안했다. 그저 바람이 향하는 곳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주말이었다. 12월 20일. 푸른빛으로 물든 하늘을 안고 차를 몰았다. 경남 산청군 산청읍에서 함양군과 거창군으로 향한 일반국도 3호선을 내달렸다.

 

▲ 산청군 금서면 평촌리 길가에 가로수로 심은 산수유들의 붉은 열매가 파란 하늘에 빛난다.

 

창 너머로 햇살이 곱게 들어왔다. 생초면 소재지에서 빠져나와 다리를 건넜다. 곧바로 가면 대전-통영 고속도로 생초 나들목이고 오른편으로 가면 화계리다. 왼쪽은 동의보감촌으로 향한다. 왼쪽으로 동의보감촌으로 틀었다. 국도를 내달릴 때는 구형왕릉이 있는 화계리를 목표로 했는데 왜 왼쪽으로 갔는지 모르겠다.

 

경남예술창작센터를 지나자 Y자형으로 갈라지는 곳에 느티나무와 정자가 있다. 한방관광지와 평촌마을 갈림길이다. 왼쪽으로 향했다. 파란 하늘에 붉은 산수유 열매가 빛난다. 길가에 가로수로 산수유가 심겨 있다. 빨간 산수유 열매가 귀엽다. 예쁘다. 차를 세웠다. 산수유 열매 아래 캔 커피 한 모금 마셨다. 따사로운 풍광이 정겹다.

 

▲ 가락국 제10대 왕의 능이라 전하는 ‘전(傳) 구형왕릉’에서 유래한 왕산(오른쪽)과 산봉우리가 붓끝을 닮았다는 필봉산이 길가 산수유를 병정인양 거느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가락국 제10대 왕의 능이라 전하는 ‘전(傳) 구형왕릉’에서 유래한 왕산과 산봉우리가 붓끝을 닮았다는 필봉산이 길가 산수유를 병정인양 거느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848m의 산봉우리가 붓끝을 닮은 필봉산 주변 마을에서 문인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한다. 산 정상은 가파른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모양새가 여인의 젖가슴을 닮아 ‘유두봉’이라고도 부른단다. 923m의 왕산은 북쪽 산기슭에 가락국 마지막 왕의 무덤으로 전(傳)해오는 구형왕릉이 있다.

▲ 산청군 추내마을 비석 옆에는 산삼을 캔 듯 “심 봤다~”하고 크게 외치는 심마니 일행의 조형물이 반긴다.

 

필봉산과 왕산을 두 눈으로 바라보며 운전하는 기분이 상쾌하다. 추내마을 비석 옆에는 산삼을 캔 듯 “심 봤다~”하고 크게 외치는 심마니 일행의 조형물이 반긴다. 붉은 산수유 열매들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빛난다. 산으로 올라가면서 길은 약간씩 가파르다.

 

▲ 수령이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는 지난여름의 무성한 여름 잔치를 끝내고 이제는 겨울 햇살에 온전한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지팡이를 쥔 노인처럼 나무 한 그루가 덤덤하게 서 있다. 수령이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는 지난여름의 무성한 여름 잔치를 끝내고 이제는 겨울 햇살에 온전한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무 높이가 22m, 둘레가 650cm인 나무는 철제 지지대 여러 개에 의지해 하늘 향해 있다. 낙엽의 바스락바스락 소리에 커피 한 모금 다시 마셨다. 온전히 드러낸 나무 아래에서 숨 가쁘게 살아왔던 올해를 돌아보았다.

▲ 산청군 봉화산 아래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지리산 자락 사이로 산청 경호강의 상류인 임천강이 굽이쳐 돌아가고 강을 사이에 두고 함양군과 산청군의 경계가 보인다.

 

나무의 배웅을 받으며 산으로 올라갔다. 얼마 전 올라갔을까 산 아래 풍광이 펼쳐진다. 지리산 자락 사이로 산청 경호강의 상류인 임천강이 굽이쳐 돌아가고 강을 사이에 두고 함양군과 산청군의 경계가 보인다. 바삐 걸음을 재촉할 이유가 없는 나는 저너머 풍경에 다시금 커피 한 모금 마셨다.

 

봉화산 봉수대 2Km를 알리는 이정표에 잠시 마음이 설렜다. 봉수대가 있는 곳이면 주위 풍경을 한눈에 쉽게 볼 수 있을까 싶어 올라갈까 싶었기 때문이다. 봉수대로 향하지 않았다. 여기서 본 풍경으로도 만족했다. 동의보감촌과 화계, 함양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화계 쪽으로 틀었다. 올라온 길을 따라 내려간다. 화계리에 이르자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는 덕양전이 나온다. 덕양전을 나중에 둘러보기로 하고 바로 구형왕릉으로 향했다.

▲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는 가락국 제10대 왕의 능이라 전하는 ‘전(傳) 구형왕릉’

 

소나무 터널길을 지나자 왼편으로 유의태약수터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곧장 더 올라가면 구형왕릉이다. 정확하게는 ‘전(傳)’ 구형왕릉 앞이다. 가야의 마지막 10대 임금이자 김유신 장군의 증조부인 김구해 구형왕이라고 확정되지 않아 전하여 올 뿐이다. 왕릉을 품은 이 산자락이 왕산이다. 왕릉 주위에는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의 별궁이었다는 수정궁과 왕산사터가 있고 옛 도읍을 바라봤다는 왕경루 등이 있다.

 

왕릉 앞에는 홍살문이 서 있다. 홍살문으로 가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오후 2시인데도 다리는 빛나는데반해 건너편은 왕산에 깊이 드리워진 그늘이 왕릉을 덮고 있다. 졸졸 흐르는 개울을 지나자 마치 속계(俗界)를 벗어나 선계(仙界)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 ‘전(傳) 구형왕릉’으로 가는 길에서 졸졸 흐르는 개울을 지나자 마치 속계(俗界)를 벗어나 선계(仙界)로 들어서는 기분이다.

 

홍살문을 지나 곧장 왕릉으로 향했다. 왕릉은 산기슭에 일곱 층으로 이뤄진 돌무덤(적석총積石塚)이다. 네 번 째 층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는 데 감실이란다. 부드러운 흙으로 된 신라와 가야 무덤과는 다르다. 낯설다.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넘긴 비운의 왕이라 김해에 묻히지 못하고 여기에 이렇게 돌로 묻혔을까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나를 돌사자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돌무덤 앞에는 가야시대가 아닌 후대에 세운 문인석과 무인석, 석등 등이 있다. 제단 뒤에는 ‘가락국형왕릉’이란 비석이 서 있다. 돌무덤을 빙 두른 돌담을 천천히 걸었다. 물기 머금은 흙이 질퍽 인다. 낙엽은 경쾌한 ‘바스락’ 소리마저 멈췄다.

 

▲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산에 올라 개성을 바라보며 옛 임금을 그리워한 고려말 충신 농은 민안부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세운 망경루.

 

왜 장렬하게 죽음으로 신라에 대항하지 못하고 나라를 통째로 바치고 여기 이곳에 묻혔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구친다. 돌담을 돌아 왕릉을 나왔다. 홍살문 앞에 이르자 내 등 뒤로 햇살이 빚어 만든 내 그림자가 길게 드러누웠다. 그림자를 밟을 수 없다. 밟으려 발을 잽싸게 내뻗으면 그림자도 저만치 내 앞에 가버린다.

 

달걀로 바위 치기라는 현실 속에 오히려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죽음으로 명예를 더 높이기 전에 항복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나라를 통째로 신라에 받친 죄스러움은 평안하게 김해에서 묻히지 못하고 여기 이곳에 돌로 솟구치는 미안함을 꾹꾹 누른 것은 아닐까.

 

▲ 가락국 마지막 왕인 구형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덕양전.

 

맑은 개울 물소리를 뒤로 하고 덕양전으로 향했다. 덕양전으로 가기 전에 정자가 보이는데 편액이 ‘망경루’다. 혹시나 구형왕이 옛 도읍을 바라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던 곳인가 싶어 근처에 차를 세웠다. 이곳은 고려말 충신 농은 민안부의 후손들이 세운 정자다. 농은 민안부는 고려 공민왕 때 장원급제로 관직에 올랐지만,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반대해 두문동에 숨은 72현 중 한 분이었다. 탄압을 피해 이곳까지 숨어 살았다고 한다. 선생은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왕산에 올라 개성을 바라보며 옛 임금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후대에 누각을 짓고 선생의 뜻을 기리고 있다.

 

덕양전은 돌담을 비롯해 여러 곳을 보수하고 있었다. 출입을 금하고 있어 문 사이로 덕양전을 바라보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덕양전 앞뜰에는 목련의 겨울눈이 하얗게 핀 꽃 같다. 온 힘을 다해 만들어온 겨울눈에 겨울 지나 봄이 오면 잎이 열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을 온 우주의 기운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경이롭다.

▲ 덕양전 앞뜰에는 목련의 겨울눈이 하얗게 핀 꽃 같다.

 

산청으로 떠난 겨울여행, 넉넉한 겨울 햇살 덕분에 잠시 천 년 넘는 시간 속으로 걸은 하루다. 그곳은 따뜻했다. 마음은 포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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