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호에서 12월의 해넘이를 보며

오늘도 내일도 해는 뜨고 진다. 그러나 12월의 해는 다르다. 사람이 편하자고 시간을 나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다. 새로운 시작을 맞기 위해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내는 시간이 12월이다. 본능처럼, 의식을 치르듯 우리는 12월 해넘이를 보냈다. 나 역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기 위해 12월의 해넘이를 보러 경남 진주 진양호로 15일 떠났다.

▲ 진양호에는 한적한 산책로가 곳곳에 있다.

진주 하대동 집을 나와 남강이 주는 아늑한 풍경도 즐길 요량으로 강변으로 에둘러 차를 몰았다. 20여 분 뒤에 진양호라는 큼지막한 현판이 내걸린 진양호 입구에 다다랐다. 입구에 들어서면 좌우로 넉넉한 가로수가 반긴다. 입구에서 2~3분 거리에 있는 ‘진주시 두석장 전수교육관’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곧장 차로 내달려 진양호까지 한달음에 갈 수 있지만 12월의 해넘이를 보는 내 마음은 그렇게 바쁘지 않다.

▲ 진양호 가족 쉼터로 들어가는 입구.

 

주차장 건너 가족 쉼터로 걸었다. 오른편으로는 나무로 만든 길이 진양호로 향하지만 나는 ‘S’라인의 짧은 대나무 샛길로 들어섰다. 대나무를 나오자 서어나무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며 반긴다. 가족 쉼터에는 나 혼자다. 얕아 흐르는 소리조차 없는 도랑에 새빨간 남천 열매들이 반쯤 제 몸을 물에 담은 채 아주 느릿느릿 흐른다. 도랑 주위에 심은 화살나무에도 붉은 열매가 사이사이 보인다. 앙상한 가지 사이로 마지막 붉은 잎이 탐스럽다. 마치 오늘 태양을 맞는 내 마음 같다.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을 무렵부터 얼마나 자주 찾았는지 긴 의자에 앉아 캔커피 한 모금으로 마시자 당시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 화살나무의 앙상한 가지 사이로 마지막 붉은 잎이 탐스럽다. 마치 오늘 태양을 맞는 내 마음 같다.

놀이터를 지나자 진양호로 올라가는 나뭇길이 나온다. 성큼성큼 소나무와 독일가문비 나무 사이로 올라간다. 가족 쉼터 입구에서 보았던 진양호 올라가는 나무 길이 하나가 되었다. 쑥쑥 하늘 높게 솟은 나무 사이 솔 향 좋고 바람이 시원하다. 고운 이끼가 나무를 온몸으로 감싼 나무 앞에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숲 사이 햇살이 은은하게 드는 자리에 초록빛을 맘껏 발산하는 이끼가 어여쁘다.

▲ 진양호 산책로에서 만난 이끼의 초록빛이 어여쁘다.

산책로가 끝나자 공원 매점 앞 주차장이다. 주차장 앞에는 휴게전망대, 아시아호텔, 동물원, 진주랜드, 이재호노래비, 남인수노래비, 일년(소원계단), 레스토랑, 우약정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한가득하다. 왼쪽 우약정으로 향했다. 그런데도 자꾸 고개를 돌렸다. 진주랜드 아래에 있는 지하여장군의 넉넉한 웃음이 돌아보게 한다. 날카롭고 험상궂은 전하대장군 옆에 있는 지하여장군은 통통한 볼살만큼이나 옆으로 한껏 입을 벌려 이를 드러낸 모습이 정겹다. 내 올해 목표 중 하나인 ‘거울 보면 웃기’가 문득 떠올라 더불어 따라쟁이처럼 웃는다.

▲ 진양호 매점 앞에 있는 지하여장군의 넉넉한 웃음은 자꾸만 따라 웃게 만든다.

매점을 지나 우약정으로 올랐다. 계단 좌우에 향나무들이 있고 계단 끝에는 사자상이다. 사자상 아래에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린 사자의 돋을새김은 언제봐도 웃음이 묻어난다. 옆에서 입을 크게 벌렸다. 사자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고향을 그리며 세운 우약정에는 여의주를 문 용들이 기둥을 타고 올라간다. 정자에서 잠시 진양호를 내려다본다. 현재 시각 오후 3시. 아직 해는 서산으로 갈 때가 멀었다며 주황 가득한 노란 빛을 호수에 드리운다.

▲ 진양호 우암정에서 가족 쉼터로 내려가는 숲길은 갈색빛 고운 산책길이다.

우암정 앞에서 가족 쉼터까지는 272m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올라왔던 산책로가 아니라 숲길이다. 소나무 잎들이 폭신하게 깔렸다. 어제 내린 비에 먼지 하나 없이 땅은 가볍게 무거운 내 몸을 받쳐준다. 갈색빛 나뭇잎 사이로 초록빛 청미래가 보인다. 빛이 곱다. 청미래 옆에는 굴참나무 어린잎이 커갈 준비를 하고 있다. 쉼터로 내려가지 않고 다시 우암정으로 돌아왔다. 망향비 사이로 호수로 내려갔다. 길을 따라 걸었다. 숲이 주는 평안이 좋다.

▲ 진양호 우암정에서 호수로 내려가는 길은 울창한 나무 사이로 해가 보이고 호수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해가 보이고 호수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진주에서 나고 진주에서 사는 진주 토박이면서도 진양호 숲길이 처음이다. 마치 비밀의 정원으로 향하는 걸음처럼 낯설지만 정겹다. 호수와 해가 나무 사이로 따라온다. 단풍나무잎들이 길을 붉게 물들였다. 비단길을 걷는 양 조심스럽다. 가을의 흔적이 물씬 묻어나는 길이다. 내 몸도 붉게 물들었다.

▲ 진주에서 나고 진주에서 사는 나에게도 진양호 숲길은 비밀의 정원처럼 낯설면서 가을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다.

의자에 앉았다. 해를 보며 한 모금, 반짝이는 물결 한 번 보며 한 모금, 찬찬히 커피를 마신다. 우암정에서 진양호 진주시청 조정부 창고까지 불과 20분이면 충분히 내려올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도 가을을 물들이는 풍경은 쉽게 걸음을 옮기게 하지 않는다. 1m에 진양호 레스토랑들이 있는 주차장으로 가는 계단이 있는데 조정부 창고 앞에서 물을 만났다. 돌멩이를 징검다리 삼아 조심조심 건너 계단을 올랐다.

▲ 오르면 한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진양호 일년(소원)계단.

메타세쿼이아 앞에는 진주시 조정훈련장 안내판이 서 있고 길 건너에 남인수 동상이 서 있다. 당광나무 열매가 흑자색으로 익어가고 노란 개나리가 계절을 잊고 핀 사이를 지나 전망대를 향해 올랐다. 진주시민들의 식수로 사용하는 취수탑으로 가는 갈림길 앞에 일년계단으로 한 계단씩 밟고 올랐다.

1년 365일처럼 계단은 365개다. 계단 하나하나를 밟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올해도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내게 격려를 보내고 내 버팀목인 아내와 가족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올라간다. 함께했던 나를 아는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으며 고마운 분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올랐다. 일년계단을 오르면 한가지 소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하기에 소원을 빌었다. 고마운 이들이 많아서 ‘나를 비롯해 소중한 인연을 함께하는 모든 이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라고 소원함에 메모 적어 넣었다.

▲ 층층 마련된 테라스에서 시원한 진양호 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 휴게전망대.

층층 마련된 테라스에서 시원한 진양호 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 전망대에 이르렀다. 1층에서 계단 오르면서 흘린 땀을 훔쳤다. 2층 매점으로 올랐다. 따뜻한 커피와 비스킷 과자를 주문했다. 비스킷이 달고 고소하다. 통유리 너머로 진양호의 정경을 구경하면서 올해 세웠던 계획을 돌아보았다.

▲ 진양호 전망대 휴게실에서 바라보는 진양호의 해넘이는 올해 열심히 살아온 내게 주는 선물이다.

따뜻한 커피와 과자를 먹으며 풍경에 취해 있는데 해넘이를 앞둔 하늘이 예사롭지 않다. 어느새 구름이 몰려왔다. 통유리 사이로 해가 구름 사이로 헐떡이며 넘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현재 시각 오후 4시 44분. 해넘이는 사방으로 뒤덮인 구름 사이로 아쉽게도 넘어간다. 노란빛이 구름 사이로 안간힘을 쏟듯 뿜어져 나온다. 2층을 나와 3층으로 올랐다.

▲ 재 시각 오후 4시 44분. 해넘이는 사방으로 뒤덮인 구름 사이로 아쉽게도 넘어간다. 노란빛이 구름 사이로 안간힘을 쏟듯 뿜어져 나온다.

180도 아니라 280도로 펼쳐진 진양호 전망이 가슴을 여밀고 들어온다. 서부경남인들의 젖줄인 진양호가 만들어진 진주댐에서부터 시작해 물문화관 노고단(1,507m) 반야봉(1,732m) 삼신봉(1,289m), 제석봉(1,806m), 천왕봉(1,915m)이 잔잔한 호수 위로 펼쳐진다. 어디에서 이런 장관을 손쉽게 구경할 수 있을까 싶어 아쉬운 해넘이를 뒤로하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 180도 아니라 280도로 펼쳐진 진양호 전망이 가슴을 여밀고 들어온다.

햇살이 부딪혀 튀어 오르는 진양호를 보며 올해도 저렇게 갈무리한다. 나에게 진양호는 ‘당신 정말 열심히 잘했노라’고 칭찬의 인사를 건넨다. 수고한 나 자신을 위해 진양호는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준다. 진양호는 올해 수고한 내게 주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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