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신안면 산책로를 따라서

“진주에서 궁금해서 왔어요~ 운동하러”

털모자에 긴 방한화 신고 두툼한 겨울 잠바 입은 50대 초반의 중년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경남 산청 신안면 엄혜산으로 우산을 지팡이 삼아 올라간다. 사내처럼 나 역시 진주에서 오가며 궁금했다. 그래서 12월 2일 여길 걸었다. 산청군 신안면 양천강 산책로가 특히나 밤이면 조명을 받아 빛나는 다리가 궁금했다.

▲ 산청군 신안면 원지산책로

신안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양천강으로 가는 길은 5분도 걸리지 않는다. 남쪽으로 그냥 걸으면 나온다. 더구나 지리산을 닮은 듯 아주 뾰족한 형상을 한 토현교는 한눈에 쉽게 찾을 수 있다. 토현교 3개의 교각에는 한방과 딸기, 래프팅 같은 상징이 각각 그려져 있다. 교각 위에는 지리산을 닮은 산 모양의 아치가 있고 가운데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펜을 닮은 주탑이 우뚝 솟아 있다.

▲ 산청군 신안면 토현교

다리를 건너면서 아래 양천강을 바라본다. 이편과 저편의 습지에 겨울 철새들 자맥질이 한창이다. 다리를 건너 오른편으로 방향을 잡아 양천강 옆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강 건너는 나무 산책로인데 반해 여긴 시멘트 포장길에 가운데 우레탄이 깔렸다. 엄혜산 정상과 법륜암으로 가는 갈림길 이정표가 나온다.

▲ 산청군 신안면 엄헤산과 양천강를 거니는 원지산책로.

누더기가 해져서 속에서 나온 솜털 모양 같은 흰 깃털의 열매가 있다는 주홍서나물이 갈림길에서 다소곳이 고개 숙여 내 결정을 기다린다. 정상까지 불과 0.85km. 한달음에 걸어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올 듯 하늘은 회색빛이라 조심스럽고 낮은 산도 만만하게 볼 수 없어 산책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갈림길을 벗어나 강변 산책로로 걸어가자 산 쪽에는 잎들이 다 떨어지고 갈색 털을 가진 열매만 유난히 덩그러니 남은 털굴피나무가 서 있다. 아래에는 미국쑥부쟁이가 갈색 나뭇잎을 배경으로 독사진 찍듯 서 있다, 보랏빛 꽃은 마치 추워서 입술이 파래진 모양이다.

▲ 산청군 신안면 엄헤산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대나무 숲길.

엄혜산 옆으로 난 벼랑을 따라 난 산책로를 지나자 잠수교가 나온다. 그대로 산으로 가는 길로 접어들자 대나무 숲길이 나왔다. 강물 소리가 사각사각 대나무 소리와 함께 합창으로 들린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이 푹신푹신.

▲ 산청군 신안면 법륜암 앞에서 만난 플라타너스.

대나무 숲길이 끝나자 커다란 버즘나무가 나왔다. 그 옆에 여느 시골집 같은 슬래브 건물이 법륜암이다. 법륜암은 낙엽들에 둘러싸였다. 주인 없는 암자로 들어가자 입구에 수국이 있다. 모두 화려했던 지난 시절을 잊고 꽃을 떨구었는데 두 송이 옅은 보랏빛 수국이 꽃을 피웠다. 수국 맞은편 불탑 위에 동자승 작은 조각상이 3개 올려져 있다.

▲ 산청군 신안면 법륜암 입구에 수국이 있다. 모두 화려했던 지난 시절을 잊고 꽃을 떨구었는데 두 송이 옅은 보랏빛으로 꽃을 피웠다.

법륜암을 나와 아름드리 플라타너스를 올려다볼 때 대나무 숲길 사이로 진주에서 온 50대 초반의 사내를 만난 것이다. 사내는 산 정상으로 가는 다리를 건넜고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나왔다. 잠수교를 건넜다. 지나온 산책로가 저기 아슬한 벼랑에 있었다. 잘 가꾸어진 길 덕분에 위험한 벼랑을 쉽게 돌아 여기까지 왔다.

▲ 산청군 신안면 원지산책로가 아슬한 엄혜산 벼랑에 있다. 잘 가꾸어진 길 덕분에 위험한 벼랑을 쉽게 돌아 여기까지 왔다.

남으로 기다랗게 향한 둑을 걸었다. 둑을 사이에 두고 왼쪽에 양천강이, 오른쪽에 경호강이 흐른다. 두 강물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저기다. 높은 곳의 경호강이 얕은 양천강으로 흘러 하나가 되어 남강으로 흘러간다. 둑 끝에는 빨래하기 좋은 너른 시멘트 바닥이 놓여 있다. 둑 끝에서 걸어온 길을 돌아보자 백마산과 적벽산이 보인다.

▲ 산청 양천강과 경호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본 백마산과 적벽산, 엄혜산(왼쪽부터)

둑에서 내려와 자갈을 밟으며 두 물이 만나는 곳으로 좀 더 걸었다. 엄혜산의 벼랑이 아름답다. 아래 나무들이 곱다. 물에 비친 산과 나무는 파스텔로 그린 그림처럼 따뜻하다. 이미 가버린 가을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있다. 따뜻한 그림 같은 풍광 끝에는 대전-통영 고속도로가 지나고 그 아래로 성철스님 생가인 겁외사가 있다. 을씨년스런 하늘을 날려버릴 듯 두 물이 하나 되는 곳에 가자 더욱 물소리는 맑고 컸다.

▲ 산청군 양천강과 경호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비친 산과 나무는 파스텔로 그린 그림처럼 따뜻하다. 이미 가버린 가을의 끝자락을 움켜쥐고 있다.

한참을 구경하다 다시 돌아 나왔다. 이곳으로 걸어올 때 보았던 새 한 마리가 여태 그대로다. 수행하는 수행승처럼 인기척에도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기다란 다리를 강가에 내디디고 꿈쩍도 하지 않는 철새를 지났다.

수행승 같은 철새를 지나자 작은 돌 위에서 강물을 바라보는 하얀 왜가리 한 마리 눈에 들어온다. 왜가리의 하얀 날개와 녹 푸른 강물이 아름다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데 오리떼들이 하얀 왜가리에게 마치 돌진하는 모양새로 우르르 다가간다. 왜가리는 무덤덤하다. 그들을 구경하는 나만 카메라 셔터 누르기 바빴다.

▲ 왜가리의 하얀 날개와 녹 푸른 강물이 아름다워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데 오리떼들이 하얀 왜가리에게 마치 돌진하는 모양새로 우르르 다가간다. 왜가리는 무덤덤하다.

빗방울이 떨어진다. 서둘러 마을 쪽으로 걸었다. 양수정(兩水亭)에 올랐다. 겨울비가 두 강물 위로 사정없이 떨어진다. 고독한 수행승같이 꼿꼿이 서 있던 새는 비를 맞으며 그대로 있을지 궁금했다. 정자에서 나와 근처 커피가게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오늘 산책길을 되새김질했다.

궁금해서 걸었던 길은 가을의 끝자락을 움켜쥔 따뜻한 풍광에 깊어갈 저만치 가버린 가을을 기억하는 시간이었다.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