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착오적인 흑백논리

내게 <건국전쟁>은 ‘안 보고 싶은데 보고 싶은 영화’ 였다. 사회적인 합의가 거의 끝난 역사적 사실에까지 딴지를 거는 영화를 굳이 극장까지 가서 볼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한국현대사 연구를 직업으로 삼은 자로서 드물게 누적관객 100만을 넘긴 역사 다큐멘터리를 마냥 모른 척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건국전쟁>을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100만 명이나 본 영화니까 뭐라도 있겠지 하고 내심 기대를 했지만,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다. <건국전쟁>은 너무 이상한 영화였다.

영화  포스터/  ⓒ 다큐스토리 프로덕션 대한민국사랑회 트루스 포럼 제공
영화 포스터/  ⓒ 다큐스토리 프로덕션 대한민국사랑회 트루스 포럼 제공

영화를 보는 내내 눈에 걸리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건국전쟁>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을 이승만 혼자 주도한 것처럼 그리지만, 이는 단순한 생략을 넘어 왜곡에 가깝다. 미국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이승만 말고도 더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승만이 딱히 이들을 대표하는 지위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왜 이승만만 거론할 뿐 그 외의 다른 독립운동가는 죄다 꿔다논 보릿자루 취급한다. 

이승만의 외교노선만이 유일하게 현실적인 독립운동노선이었다는 주장은 독립운동의 다양성과 의미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짓이다. 세계 열강이 2차대전 말기에 한국의 독립을 결의한 것은 그저 공짜로 베풀어준 시혜가 아니었다. 무장투쟁과 의열투쟁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의지가 거듭 확인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러니 전체 독립운동에서 외교노선과 무장투쟁, 의열투쟁은 서로 밀접하게 얽힌 상보적 관계였지 따로 두부 자르듯 구획된 것이 아니었다.

또한 괴상한 논리도 종종 보였다. 한국전쟁 초기 이승만이 서울을 비우고 도망친 것을 두고, <건국전쟁>은 전문가의 입을 빌어 전쟁에서 국가원수가 반드시 최전선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며 이승만을 변호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이승만이 전쟁 내내 전선을 돌아다니며 장병의 사기를 높이는 데 힘썼다고 상찬한다. 논리적 일관성이 채 5초를 못 가는 셈이다.

당장 눈에 띄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다. 작심하고 따지면 어떻게 될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어쩌면 분초 단위로 인수분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영화의 완성도는 그 정도로 조악하다. 하지만 나는 <건국전쟁>의 조악한 완성도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영화의 진짜 해악은,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흑백논리로 퇴행시키는 것에 있다고 본다.

대한민국의 탄생, 비밀의 문이 열린다?

당장 제목부터가 그렇다. 제목만 봐서는 <건국전쟁>의 주요 내용이 1945년부터 1948년에 이르는 ‘건국’(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영화는 그보다 이승만 개인의 일대기를 그리는데 훨씬 더 주력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건국전쟁’이라는 제목을 사용한 것은 이승만의 친일 행적을 비판했던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2012)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 비판에 대한 반(反)비판으로, 이승만을 독립운동가이자 국부(國父)로 추켜 올리는 것이 영화의 목적임이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승만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일까, <건국전쟁>의 주장은 결국 기괴한 수준으로까지 치닫는다. 영화는 결말에 이르러, 이승만을 비판하는 것은 북한의 주장이므로 이승만을 비판하는 것은 곧 북한을 추종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내놓는다. ‘이승만 비판=종북좌파’라는 오래전 사라진 줄 알았던 흑백논리와 색깔론이다.

철 지난 이야기를 새삼스레 반복하기 때문일까, 온라인상에는 <건국전쟁>에 대한 비판도 만만찮다. 유튜브에서 널리 알려진 한 역사강사는 이승만이 국부가 아니라 ‘런승만’(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run) 것을 꼬집는 비칭)인 이유를 조목조목 들어 <건국전쟁>의 내용을 반박하기도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반론 역시 흑백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런승만’이라는 비칭을 내세우는 순간 이미 이승만은 조롱의 대상일 뿐 그 외의 다른 여지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 역시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다. 국부라는 우상숭배도, ‘런승만’이라는 조롱도, 누군가를 ‘악’으로 규정하여 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는 손쉬운 유혹이기는 마찬가지니까.

이승만에 대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온당한 태도는 그를 역사 속으로 고이 보내드리는 것이다. 이승만이 그저 역사 속의 인물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이승만과 그의 시대가 성취한 것과 그러지 못했던 것을 냉정하게 따져 물을 수 있다. 그로부터 지금의 우리를 위한 통찰도 얻을 수 있다. 우리 공동체가 더 건강하고 성숙해지는 길은 바로 거기에 있다.

정대훈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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