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룡 단디뉴스 편집장
서성룡 단디뉴스 편집장

영화 ‘파묘’를 아직 보지 않았다. 경남도민일보 김훤주 기자가 온라인에 쓴 글을 읽고,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 중 하나가 소위 ‘일본 쇠말뚝설’임을 알고는 영화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어졌다.

‘쇠말뚝은 없다’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김 기자의 글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한국의 주요 명산에 쇠말뚝을 박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목적은 대개 측량을 위한 표식이거나 등산로 개발을 위한 것일 뿐 ‘민족정기 말살’을 목적으로 설치한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쇠말뚝 논란’의 진실을 밝힌 것이 김훤주 기자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쇠말뚝 논란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 진행됐고, 조금만 검색해보면 ‘일본 쇠말뚝설’이 얼마나 허술하고 허무맹랑한 논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일본에서 공부했다는 어느 학자가 ‘쇠말뚝’은 일본의 주술적 종교단체 ‘음양사’에서 설치한 것이며, 한민족의 정기를 끊거나 누르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 맞다는 주장을 펼치며 다시 온라인을 달궜다. 민족감정, 특히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은 작은 불씨 하나만 던져도 금세 활활 타오르는 강력한 인화성 물질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만에 하나 일본의 주술적인 종교단체가 한민족의 정기를 끊고자 주요 명산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우리가 휘둘릴 일은 뭔가. 한민족 정기가 산맥을 타고 흐른다고 말하는 이들의 믿음을 비난하고 싶진 않다. 그런데 그 대단한 ‘민족정기’가 고작 쇠붙이 몇 조각으로 끊기거나 막힐 수 있다는 나약한 생각의 근원은 무엇인가.

한발 더 나아가 일제가 심어놓은 몇 미터짜리 쇠붙이는 두려워하면서 민족정기가 흐른다는 지리산에 수십 미터짜리 쇠말뚝 수백 개를 박고, 산허리를 강철선으로 칭칭 두르는 케이블카는 왜들 그리도 설치하지 못해 난리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지리산을 끼고 있는 산청 함양 구례 남원 등에서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앞다투어 쇠말뚝보다 수백수천 배는 더 크고 깊은 철기둥을 박겠다고 나서도, 누구 하나 ‘민족정기가 끊긴다’고 반대하는 목소리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쇠말뚝 논란’의 문제는 한민족을 지배하고자 하는 일본의 음흉한 욕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스스로 힘으로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풍수와 맥’에 대한 미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전근대적인 세계관과 열등의식에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민족정기를 목숨처럼 아끼듯 하면서 경제적 이득 ‘물신’ 앞에서는 곧바로 헌신짝처럼 내다 버리는 천박한 물신주의가 우리의 진짜 문제는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330여 년 전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천상의 운행 원리가 지상의 물리 법칙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과학문명의 출발선이 됐다. 보편성에 기초한 과학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하나씩 무너뜨리며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생존에 유리하도록만 진화해온 인간의 뇌는 여전히 적군과 아군, 선과 악, 흑과 백, 민족과 반민족 등으로 세상 만물을 이분하고 적대하는 사고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정치판도 이분법에 매몰되긴 마찬가지다. 적과 아군으로 양분해 전쟁 치르듯 오로지 상대 진영에 대한 ‘심판’만을 외치는 사이 정작 실생활과 직결된 정책은 실종되고, 인물에 대한 호불호와 줄서기만 남아 있는 것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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