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웅환 박사(통일학)
최웅환 박사(통일학)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나치 독일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전범 재판 과정에서 분석한 개념이다.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은 “평범한 사람도 악인이 될 수 있다” 혹은 “인간의 내면에 악마가 내재해 있다”로 풀이된다.

하지만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은 무사유(無思惟, thoughtlessness)로 인한 인간성 상실을 말한다. 즉, ‘악인’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행’의 동기가 무사유로 인해 행동이 진부 또는 저속하다는 설명이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던 실무 책임자로 나치 독일이 항복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한다. 이후 1960년 이스라엘 첩보기관에 의해 체포되어 이스라엘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된다. 재판 과정에서 아이히만은 무죄를 주장했다. 그의 무죄 주장 논리는 “국가적 공식 행위이므로 국가에 복종하는 것은 의무”라고 항변한다. 학살이라는 반인륜적 명령이라도 복종하는 것은 공무원(군인)의 의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유죄인 이유에 대해 “그는 아주 근면한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유죄인 명백한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사유란 누구나 마음속에 아이히만을 품고 있더라도 누구나가 아이히만이 되게 할 수도, 누구나가 아이히만이 되지 않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율스럽게 지금도 전쟁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재난이 아니라 지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로 조직화된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전쟁을 일상적인 인간 삶의 한 측면으로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평범하게 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한반도에서도 또다시, 또 다른 전운(戰雲)이 감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따른 미·중의 동아시아 역내 전략적 경쟁 심화로 미국의 안보 전략 중심이 동아시아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이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지중해의 맹주였던 스파르타와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아테네의 필연적 전쟁 즉, 신흥강국이 부상하며 기존 패권국가와 충돌하는 상황을 말한다.

BC 5세기경 지중해 지역의 패권 싸움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재현되는 형국이다. 또한 세계적으로는 자유주의 대 반자유주의 간의 가치 진영화가 심화되었다. 이는 세계대전 이후 사라졌던 민족주의 재등장을 불러왔으며, 과거에는 ‘이념 민족주의’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자원 민족주의’의 형태로 나타나 전 세계적으로 탈동조화(decoupling) 현상을 보인다.

미·중 패권 경쟁의 심화는 2016년 중국의 철강 덤핑에 대해 양국의 폭탄 관세 부과로 갈등이 본격화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미·중의 무역분쟁으로 인한 경제 충돌로 보이지만, 급변하는 세계의 중심에 급격히 부상하는 중국의 영향으로 기존 강대국과 신흥강국의 충돌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Pax Americana’라는 미국의 전통 기조와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목표로 하는 ‘中國夢(중국몽)’의 충돌이다.

이러한 정세변화는 국제정치의 하위변수로 작용하는 한반도 평화의 문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내부적으로는 북한의 핵전략 변화와 남한의 정치 외교 전략의 변화가 위험을 가중하고 있다.

북한의 핵전략은 하노이 회담 결렬 전과 후로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회담 결렬 전 북한은 ‘핵 또는 경제의 선택 귀로’에 있었다. 하지만 회담 결렬 후 ‘핵으로 경제를 이룬다’는 변화된 전략을 엿볼 수 있다.

남한은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이 중심이 되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핵심 외교정책으로 발표하여 이미 신냉전 구도에 편승한 국가전략이 되었다.

또한 DMZ 비무장지대의 무장화는 전쟁 위험을 가중한다. 지난해 11월 21일 북한의 군사정찰 위성 발사 성공으로 남한은 22일 「9·19 남북군사합의」 1조 3항(비행금지구역 설정)의 효력 정지를 발표하고 북한은 다음날 「9·19 남북군사합의」의 전면 파기를 선언했다. 군 통신선을 비롯한 남북 간의 접촉라인이 전면 단절된 상황에서 우발적 충돌로 인한 전쟁의 가능성이 커졌다.

현실적으로 다가온 전운의 위기에서 가장 큰 위협은 ‘악재’가 아니라 ‘불확실성’이다. 국제정치는 우리에게 늘 평화롭거나 우호적이지 않다. 사유의 부재는 현실을 냉철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하고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게 하며 결과는 냉혹하게 만든다. ‘계획된 전쟁’보다 ‘우발적 전쟁’의 위기를 관리할 외교 전략이 절실하다.

/최웅환 박사(통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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