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성순옥 재능교육 교사

#1

“천변을 등장수가 지난다. 등은 무던히나 색스럽고, 풍경은 그의 느린 한 걸음마다 고요하고 또 즐거운 음향을 발한다. 날도 좋은 오늘은 바로 사월 팔일. 아이들이 서너 명, 끈기 좋게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눈에, 그것들은 탐스럽게 신기하다. 만돌이는 윗입술에까지 흘러내린 시퍼런 콧물을 들이마실 것도 잊고 동무들 틈에 끼어, 바싹 장수의 뒤를 쫓아간다. ‘아마, 일 환두 더 줄게다...’ 그는 하 탐스러운 통에, 이내 참지 못하고 장수 못 보게, 그 색색이등을 만져보는데 성공하였다.”

박태원 소설 <천변풍경>에 나오는 글이다. 1930년대 청계천 변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 등장수, 옹기장수, 엿장수, 여러 봇짐 장수들이 벅적거렸을 거리. 등장수 뒤를 따라가며 한껏 욕심내보는 아이 마음이 절절이 박힌 글이다. 아련하고 아름답기까지한 등장수 뒤태를 40년이 지난 1970년대로 바꿔봤다.

"옥봉삼거리에서 덜커덩 리어카를 끌고 예사롭지 않은 카메라를 메고 젊은 새댁이 지나간다. 아이를 업은 포대기가 자꾸 느슨해질 때마다 손깍지를 해서 추스리고 행여 골목에서 “어이 사진사!"”하고 부를까 두리번두리번, 리어카 바퀴 안쪽에 색색이 풍경판이 쓰러질까 한 손을 또 얼마나 잽싸게 부리는가.

리어카에 실린 고궁풍경이며 월남전 부대이름을 딴 자동차 소품이 봄날 햇살에 아이들을 찾으러 간다. 누군가가 기별을 해서 가는 지도 모르겠다. 새댁이 사진을 찍어주고 가게로 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선금을 얼마 받고 아무 날 사진이 다 될테니 “사진관으로 찾으러 오시오” 하고 가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아내가 찍어온 카메라를 조심스레 풀어 필름을 되감고 암실에서 작업을 다 마치고 말리며 맹호부대라고 적힌 짚차 위에서 한껏 폼을 잡은 아이 모델을 흐뭇하게 바라보리라. 이들은 이후 사진 작업을 계속했을까? 어린 아이를 들쳐업고 리어카를 끌며 일명 이동사진관을 했던 새댁이 참으로 귀한 풍경을 남겨 주었다.

#2

1931년 신미생 어머님은 바느질을 잘 하셨다. 한국전쟁 전에 시집을 와서 집안 행사에 한복을 짓는 일을 도맡아 했고 안 입는 한복이며 옷을 뜯어 다른 옷도 만들고 해진 옷은 눈깜짝할 사이에 새옷처럼 꿰매는 재주를 지니셨다. 손바느질로도 달인인데 손위 동서집에 있는 발틀로 이불홑청도 드르륵, 치맛단도 드르륵 참으로 신기한 기계를 대하고부터는 틀 하나 갖고 싶어하셨다.

어느 봄날 어머님은 재봉틀을 사러 리어카를 끌고 말티고개를 넘어가셨다. 중앙시장 틀 가게에서 빨간 칠에 자개같은 무늬를 박은 틀을 싣고 옥봉동을 지나 다시 고개를 넘어오셨다. 남편 형제들은 어머니가 틀을 쓰지 않을 때는 기계를 틀 배 안에 넣고 뚜껑을 덮어 책상으로 썼다한다.

나는 그즈음 더 어린 나이에 지리산 밑에서 우리 어머니가 틀질을 할 때 천이 울지 않도록 잡아댕겨주던 기억을 묻고 있었다. 너무 판자를 야무지게 댄 리어카에 밧줄로 꼭꼭 묶은 빨간 재봉틀이 어느 계절을 가르며 고개를 넘어왔다더라.

#3

옆집에 을사년(1965년)생 오빠가 살았다. 나보다 어린 1967년생 여동생이 있었고 우린 친하게 지냈다. 시험공부도 같이 하고 콩돌놀이도 자주 했다. 하루는 무다이 리어카를 끌고 동네에 나왔다. 마을회관 앞 넓은 길에서 옆집 동생을 태우고 가다가 나도 모르게 도랑에 처박아 버렸다. 다치진 않았지만 우린 놀랬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긴 했는데 며칠 후 그 오빠가 학교에서 나를 보더니 갖고 있던 축구공으로 내 머리를 툭툭 치며 “우리 ㅇㅇ이 도랑에 처박았다면서?”하고 뭐라했다. "부러 그런 기 아인데....." 울었는지 안 울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았지만 큰일나긴 한 사건이었다. 세월이 지났고 그런 걸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하며 배시시 웃곤 한다. 그 오빠 점잖은 생원 같았는데 동생일이라고 발끈했나보다 했다.

#4

리어카를 끌고 나가는 날엔 머슴애고 가시내고 괜한 영웅심에 엉뚱한 묘기를 부리고 싶어했다. 두 바퀴를 얌전하게 돌리며 가야하는데 한번씩 바퀴를 뒤로 쏠리게 세우고 손잡이에 매달려보는 재주를 부리곤 했다. 리어카에 실린 짐이 적당하게 무거울 때 그래보는 것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시소를 탈 때처럼 무게를 고루 나누는 슬기까지 터득한 셈이었다. 아버지는 리어카가 있어도 구릉논 논둑길을 지날 때는 꼭 바지게로 짐을 날랐다. 볏짐이 많을 때는 우리보고 큰길에 리어카를 대놓고 있으라 했다. 가족 협업이 환상을 이루는 운반작업이었다. 짐을 가득 실었어도 나는 리어카를 일자로 세워 매달리는 재주를 꼭 부렸다. 괜찮은 놀이기구였지 싶다.

#5

어머니는 내 결혼 날짜를 잡고 새 그릇을 사기 위해 리어카를 끌고 덕산그릇집으로 가서 밥상 하나, 교잣상 하나를 샀다. 커피잔도 사고 그릇집에서 골라주는 반상기며 접시를 포개 싣고 리어카에 끌고 왔다. 이불짐은 그 뒤에 실어온 듯하다.

지금 같으면 백화점 어디나 주방기구백화점 같은 곳에 가서 승용차에 싣고 오지 않았을까. 동네 가숙띠기 아지매가 그릇집에 철물점을 할 때였다. 그때 리어카에 실어왔던 커피잔과 교잣상은 아직 쓰고 있다. 리어카 길이보다 긴 교잣상을 어떻게 세워 묶고 난 뒤에서 적당하게 밀고 잡고 마을길을 들어왔다. 신혼짐과 함께 고방에 모아두고 진주 신혼집으로 다시 옮겼다. 다행히 신혼집이 진주라 리어카를 끌고 가진 않았다. 리어카에 담긴 어머니 마음을 느리게 차곡차곡 싣고 왔다.

결혼을 하고 보니 리어카를 끌 일 없었지만 형님댁에서 어마무시하게 넓은 비닐하우스 농사를 짓고 있었다. 오이 농사를 했는데 수확이 많을 때는 들에 가서 도왔다. 오이 고랑이 백 미터는 되어 보였다. 내가 가서 하는 일은 오이를 수레에 싣고 나오는 것이었다. 들에 가보니 세상에 수레가 아니라 외발 리어카였다. 오이를 담고 끌고 나오는데 이리 처박히고 저리 처박히고 꼴이 말이 아니었다. 창피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한 고랑 세 번 왔다갔다해야 오이를 다 담아낼 수 있었다. “힘으로 하는 기 아이고 균형을 잡아야 합니더.” 아주버님이 말했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잘 되나. 벌써 삼십 년이 지난 일이다.

굴러가는 것 중에 가장 느리고 안전한 리어카인데 지금은 그렇게 많이 쓰이지 않는 듯하다. 쓰고 싶어도 지나갈 길이 없다. 자동차로 짐을 실어나르기도 하지만 자동차가 다니는 길에 마음 놓고 끌고 갈 수 없어 길이 없다는 뜻이다.

내 마당이 있고 들논이 있으면 거기 세워두고 꽃이나 심어 둘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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