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룡 
서성룡 

너무 일찍 잠에서 깬 일요일 새벽, 홀로 넷플릭스에 접속해 '멧 데이먼' 이름 하나 보고 무심히 플레이 버튼을 누른 영화 한 편이 종일 머리속을 맴돌고 있다. 타국으로 유학 갔다가 살인 혐의로 수형 생활하고 있는 딸을 면회 가는 빌(멧 데이먼)의 굳은 얼굴이 나오는 초반부터 나는 이미 감정에 동화돼 ‘에휴~’ 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었다. 새벽 3시라는 묘한 시간 탓인지, 아니면 심장을 물러터지게 만드는 나이 탓인지, 마치 내가 먼 타국 땅 감옥으로 딸 면회 하러 가는 기분이 들어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화의 줄거리나 흐름은 별로 복잡할 게 없다.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아빠 홀로 분투하다가 마침내 승리하는 이야기 구조는 얼마나 흔하고 흔한가. 하지만 이 영화는 인생을 막살던 ‘딸바보’ 아빠가 갑자기 초인적인 능력을 장착해 쉰내 나는(?) 사랑의 힘 따위로 가족을 구하는 그런 뻔한 스토리가 아니다.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이나 액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거의 모든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는) 멧 데이먼과 등장인물들의 묵직하지만 넘치지 않는 연기만으로 팽팽한 긴장감 속에 전개된다. 잔잔하고 다소 뻔한 이야기임에도 보는 나를 완전히 몰입시키고 완전하게 설득시켰다.

스포가 포함된 이야길 하자면, 영화의 큰 줄거리는 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 하는 아빠의 이야기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편견’에 관한 것이다. 영화 제목 ‘still water’는 주인공의 고향 미국 오클라호마 주의 한 동네 이름이기도 하지만, 사전적인 의미로 ‘흐르지 않는 고인 물’ 혹은 ‘순수한 물’이란 뜻으로 고정관념 혹은 편견의 의미를 중의적으로 담고 있다(고 본다).

우선, 딸 엘리슨이 프랑스 경찰이나 법원으로부터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살인혐의를 쓰게 된 배경에는, 동성커플이었던 니나(피살자)가 빈민 출신의 무슬림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빌이 미국에서 건너온 하층 노동자라는 점도 프랑스 사회에서 편견의 대상이 되는 모습이 여러번 강조된다. 빌을 지원하던 버지니의 친구가 ‘당신 혹시 트럼프를 뽑았느냐?’고 묻는 장면과, 총기를 소유하고 있냐고 묻는 장면.

또한 빌이 생애 처음으로 연극을 관람하는 장면에서 버지니는 첫 대사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진실은 없어요. 이야기만 있을 뿐이죠” 실제 살인 혐의를 받는 아킴도 프랑스로 건너온 이민자이고, 엘리슨의 지도교수도 유색인 이민자 출신임을 유추할 수 있는데, 빌을 만나 하는 첫 마디가 “신기하죠? 박사학위가 있으니 이런 사무실을 내어주더군요”이다.

빌을 도와서 슬렘가를 돌며 통역을 해주던 버지니는 인터뷰 대상자가 뼈 속 깊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멍청한 놈’이라고 쏘아 붙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이 장면 역시 빌을 향해 ‘트럼프를 찍었냐?’고 캐묻던 친구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편견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진보적 지식인들이 빠져있는 편견과 편협함으로 보여준다. 빌은 살인혐의자 아킴으로 부터 결정적인 증언인 ‘still water’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 입을 테이프로 봉해버린다. 이처럼 영화는 반복해서 “과연 우리는 편견을 넘어 진실을 볼 수 있는가?”를 묻고 반복해서 답한다. “진실은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라고.

인터넷과 SNS를 통해 세상의 간격은 없어지다시피 좁아지고, 자유여행과 넘쳐나는 이민자로 ‘낯선 이방인들’이 우리의 일상에 느닷없이 침투하는 세상. 좁아지는 속도만큼 인종과 종교, 민족 간의 갈등과 차별, 편견 문제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세계 곳곳에선 편견의 힘을 타고 다시 극우주의와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도 이런 큰 흐름 속에서 불붙은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로 극우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가 힘을 키워가고 있는 듯하다.

편견에서 비롯된 차별과 분리 문제는 엘리슨과 빌의 말처럼 ‘우리 인생을 잔인하게 만든다’. 해법은 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편견의 유무가 아니다.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어떤 자세로 낯선 이들을 대하며 사느냐이다. 영화는 버지니의 딸 마야와 빌의 친구맺기를 통해 이를 잘 보여준다. 호텔 방 앞에서 홀로 웅크리고 있는 마야를 위해 빌이 아무런 조건 없이 호의를 베풀었듯이, 마야는 빌에게 진실된 믿음과 사랑을 표현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낯선 타인에게 계산 없이 손을 내민 빌과 버지니처럼, 그리고 마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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