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국채보상운동 돌아보는 학술대회 열려

[사진=국채보상운동기념관 누리집 갈무리]
[사진=국채보상운동기념관 누리집 갈무리]

[단디뉴스=김순종 기자] 애국운동의 하나로 시작됐던 국채보상운동의 지역사를 돌아보는 자리가 마련됐다. 진주·사천·산청문화원는 10일 진주시청 시민홀에서 115주년 국채보상운동 기념 학술대회를 열고, 우리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조명했다. 발표자들은 당시 도청 소재지이던 진주에서 경남 최초의 국채보상금 모금이 시작됐던 점을 거론하고, 일제에 차관을 갚으려 민중들이 일으킨 이 운동은 또 하나의 애국·항일운동이었다고 소개했다.

이날 발표자로는 김일수 경운대 교양교육학부 교수, 김형목 (사)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추호석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각각 국채보상운동의 전개와 의의, 경남지역 여성단체의 국채보상운동에서 역할, 서부경남의 국채보상운동 전개와 교훈을 주제로 발표를 이어갔다. 이를 통해 이들은 국채보상운동이 국권상실을 방지하고자 한 민중들의 자발적인 ‘애국’운동이었음을 강조하고, 그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발표내용을 종합하면,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경상도에서 처음 시작됐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뒤 일제는 조선에 1300만원 상당의 차관을 강제로 빌려주고, 조선을 강제병합하기 위해 일제가 필요로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국권상실을 방지하고자 자발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은 부산 상무회의소 상인들에 의해 제기된 후 대구 대동광문회에서 본격화됐다. 이후 전국 300여개 군 가운데 200여개 이상 군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경남 진주에서는 대구에서 모금운동이 시작된 지 20여일이 지난 3월 초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남지역 첫 모금지는 현재 롯데인벤스(진주 평안동)가 있는 옛 진주객사 앞 자리였다. 운동에는 유생, 상인, 여성, 기생, 종교인, 등 각계각층의 지역민이 참여했다. 애국보상회 경남회, 진주애국상채소, 경남보상부인회, 기생조합 등을 조직화해서다. 기록에 따르면, 1907년 8월까지 진주에서만 1000원 이상이 모금된 것으로 알려지나, 총액은 알 수 없다.

 

진주객사
진주객사

진주지역 국채보상운동은 강주식, 안확, 강상호(형평운동가) 등 3명의 발기인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들은 국채보상경남회를 조직해 1907년 3월 9일 취지서를 발표했다. 취지서에서 이들은 “국채를 완전히 갚고 외채의 걱정 없이 함께 부모의 나라에서 평안히 지내시기를 눈물을 흘리며 삼가 바랍니다”라고 호소했다. 국채보상경남회 사무실은 현재 갤러리아 백화점이 자리한 강주식의 집이었으며, 3월 9일 국채보상경남회는 본격적인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다.

진주 기생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기생 부용을 중심으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부용은 진주 의봉루를 지나다가 애국상채회에서 주최한 연설을 듣고 감동한 뒤 기생들을 모아 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당시 기생들이 기부한 금액은 기록으로만, 최소 142원 이상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기생들이 독자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함에 따라 강주식 등이 모금 창구를 단일화하자고 제안했고, 부용이 이를 거부하면서 둘 사이에 다소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부터 전국에서 열띠게 진행됐지만, 그 취지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대한제국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면서다. 국채보상운동의 결과 모인 16만여 원~18만여 원의 국채보상금을 처리하기 위해 결성됐던 국채보상금처리회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9월 교육기본금관리회로 변경됐고, 국채보상금 역시 일제의 수중에 넘어가고 만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당시 모인 모금액이 사립학교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등 소기의 성과도 거두었다. 단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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