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대동서 식당 운영하는
옛 푸른소리 멤버 김범규 씨

[단디뉴스=김성대 객원기자] 유튜브 영상 하나를 본다. 1987년 대학가요제. 여기서 내가 찾던 팀은 통기타를 멘 남성 둘에 여성 두 명이 포함된 혼성 보컬 그룹이다. 팀 이름은 푸른소리로, 충북대학교 혼성4부 합창단에서 노래 꽤나 불렀던 멤버들로 구성됐다. 당시 이 대회에는 '기차와 소나무'로 유명한 이규석(중앙대학교)이 블루드래곤이라는 팀 멤버로 나오기도 했다.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출전한 작품하나가 '난 아직도 널'로 대상을 받은 이 대회에서 블루드래곤은 '도시의 침묵'을 부른 푸른소리와 함께 동상을 받았다. 때는 정확히 신해철이 무한궤도라는 이름으로 '그대에게'를 들고 같은 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기 1년 전. 비장함과 스산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도시의 침묵'을 감상한 내 눈은 자연스레 영상 아래 달린 댓글 하나에 눈이 갔다. "당시 나는 이 팀을 대상으로 찍었었다." 푸른소리는 그렇게 잊혀져 갔다.

그 푸른소리에서 가장 인상 깊은 목소리를 들려준 사람은 관객이 바라보는 왼쪽서 기타 치며 노래한 김범규(54) 씨. 현재 진주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살고 있는 그의 고향은 속리산과 청주 사이에 있는 미원(米院)면이다. '미원'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쌀농사를 잘 지었다 해 '쌀안'이라 불린 것을 한자로 바꾼 말이다. 김 씨는 그런 미원에서 7살 때까지 살다 지척인 청주에서 학교생활을 했다. 충북대학교 출신이니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포함해 청주에서 학창 시절을 다 보낸 셈이다. 대중음악과 관련해 그의 대학 선배로는 '바람 바람 바람'으로 유명한 싱어송라이터 김범룡과 '햄(HAM)'을 부른 김승기가 있다.

김 씨는 할아버지대부터 영향으로 기독교 음악(가스펠)에 영향을 받았다. 둘째 형이 사놓고 치지는 않던 세고비아 기타로 '이정선의 기타 교실'을 뒤적여가며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시작한 그는 국내 가스펠의 태동이라 할 '실로암'을 부르며 가수의 길에 조금씩 눈을 떴다. A(라)음만 인지하는 튜닝 도구인 피치 파이프(Pitch Pipe)로 기타를 조율하던 시절. 당시엔 그나마도 집에서 40분 정도를 걸어가 할 줄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맞춰야 했다. 그러나 겨울이라도 되면 힘들게 조율한 그 음들마저 죄다 틀어져버리곤 했던 시대를 김 씨는 살았다. 그는 기타 넥(Neck)과 줄 간격이 멀어 손가락에 물집이 잡혀야 기타를 잘 치는 줄 알았던 세대이기도 했는데, 나중에 그는 알게 된다. 고수들은 아무리 기타를 쳐도 물집 따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과거 김 씨는 그저 힘으로만 연주한 것이다. 그 버릇은 아직도 손끝에 남아 김 씨를 괴롭히고 있다.

 

푸른소리 멤버들
푸른소리 멤버들
1987년 제11회 대학가요제 당시 무대에서 푸른소리 멤버로 열창 중인 김범규 씨. 무려 35년 전 이야기다. [사진=유튜브 갈무리]
1987년 제11회 대학가요제 당시 무대에서 푸른소리 멤버로 열창 중인 김범규 씨. 무려 35년 전 이야기다. [사진=유튜브 갈무리]

그에게 음악과 관련해 기억에 남는 첫 장소는 옛 청주에 있던 세레나데라는 공간이다. 세레나데는 청주의 요지인 중앙공원 인근에 있던 극장식 음악감상실로 어두운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시대의 조류를 개척해 나갔던 사람들"이었던 디제이의 부스도 한 자리에 마련된 곳이었다. 당시 디제이들은 음악감상실을 넘어 CBS 같은 메이저 방송사 디제이까지 겸했다고 한다. 김 씨 증언에 따르면 그래서 그 시절 본정통(本町通-일제 강점기 때 서울, 부산, 청주, 군산 등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를 이른 말)에 디제이들이 지나가면 과장 좀 섞어 사람들이 BTS 바라보듯 했다고 하니,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 씨는 세레나데의 오픈 공연에서 '비 오는 거리'의 이승훈도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푸른소리를 빼놓을 수 없다. 당초 푸른소리는 100명 규모 충북대학교 합창단 홀리보이스(Holy Voice) 내 소규모 중창단으로 결성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싱어송라이터 안치돈이 있었다. 안치돈은 홀리보이스에서 평소 노래 잘하는 후배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네 명을 지명해 푸른소리를 결성한 것인데, 그 네 명 안에 김 씨도 포함됐다.

사실 푸른소리는 대학가요제에서 동상을 받기 3년 전인 1984년 제5회 강변가요제에 나가 '구름강강산술래'라는 곡으로 금상을 받기도 했다(이 역시 안치돈의 곡으로, 작사는 봉진근이 했다). 이선희가 4막5장이라는 듀엣으로 부른 'J에게'가 대상을 받은 바로 그 해 일이다. 이 대회에는 이후 배우로 명성을 떨치는 한석규가 덧마루라는 팀에 소속돼 출연하기도 했다(덧마루가 부른 '길잃은 친구에게'는 장려상을 받았다). 하지만 푸른소리는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음에도 솔로나 듀엣이 각광받던 시절 중창단이라는 태생적 한계와 지금도 진행형인 '수도권 중심'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이기지 못한 채 사실상 활동을 접어야 했다.

현재 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고 있는 안치돈은 대중보단 민중에 더 관심이 많았다. 80년대 당시 시국이 시국인지라 김 씨 역시 그런 선배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제대 후 '데모 문화 선봉단'에서 활약한다. 필자는 이것이 어쩌면 27년간 병상 생활을 한 끝에 세상을 떠난 부친과 막노동을 해가며 가정을 보살핀 모친을 보며 그의 내면에 쌓였을 반사회적 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음악 취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후 도종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충북 문화운동연합 회장을 역임하던 때 김 씨는 녹두패라는 노래 분과 기획실장을 맡으며 같은 세계에 더 깊이 발을 담근다. 녹두패는 농민회가 움직이면 그 앞에서 서슬 퍼런 노래로 분위기를 만들던 단체로, 과거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보다 더 진보적인 민중노래 집단이었다. 선배 안치돈처럼 그에게도 대중은 민중에 더 가까운 존재였던 셈이다.

 

김 씨는 인터뷰 도중 트윈 폴리오의 웨딩케익과 김도균의 천사가 된 너에게 김두수의 청보리밭의 비밀 등을 노래했다.
김 씨는 인터뷰 도중 트윈 폴리오의 웨딩케익과 김도균의 천사가 된 너에게 김두수의 청보리밭의 비밀 등을 노래했다.

김 씨는 "진정한 맛집에는 나만 음미하고 싶은 무엇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맛집이어도 웨이팅 걸리는 곳엔 안 가게 된다는 얘기다. 김목경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나 김두수의 '청보리밭의 비밀'이 김 씨에겐 그런 숨겨진 맛집 같은 노래들이었다. 하지만 김목경 곡의 경우 메이저급 가수들이 부르면서 '국민 가요'가 되어버린 것이 김 씨는 못내 아쉽다. 너무 많은 사람이 알아버린 맛집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인이 좋아하는 조용필과 이선희의 노래에도 딱히 감동 받은 적이 없다는 그의 이런 마이너 취향은 이제(가스펠과 더불어) 자신의 음악 뿌리와도 같은 포크를 겨냥한다. 즉, 한국 포크 음악은 윤형주나 송창식 같은 사람들이 다 망쳤다고 그는 보는 것이다. 이는 저들이 한국에 포크 붐을 일으켰고 해당 장르를 발전시켰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정반대 얘기여서 당혹스럽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들은 대리 코드나 변환 코드가 아닌 카포(Capo) 의존형 기타 연주를 했기에 그렇다고 한다. 실제 두 사람이 결성한 트윈폴리오 음악도 대부분 카포를 끼워 친 탓에 연주가 자유롭지 않다는 게 김 씨의 생각이다. 지금도 송창식의 기타 퍼포먼스에선(스트로크 터치 만큼은 인정해도) 오픈 코드 연주를 볼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김 씨가 좋아하는 뮤지션 중엔 이성원이라는 사람도 있다. 프로그레시브 포크 뮤지션 이성원은 앞서 김 씨가 애청곡으로 언급한 김두수의 '청보리밭의 비밀'에서 기타 반주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LP 한 면에 노래 두 곡 있는" 프로그레시브 록 애호가인 김 씨는 한때 이성원의 '이 밤에'라는 곡을 듣고 벼락 같은 충격을 받는다. 이후 그는 이성원을 청주에서 직접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음악감상실 세레나데에서였다.

"세레나데에 공연을 하러 온 이성원 씨는 3일 전부터 공연장 입구에서 물구나무를 서 기를 모으던 도인 같은 뮤지션이었다. 장비도 단촐해 야마하(Yamaha) 기타 한 대 뿐이었고, 세션으론 153센티미터 정도 되는 단신의 일본 베이시스트 한 명만 대동한 채였다. 벽을 타악기 삼아 노래 부르던 그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음악을 김 씨는 왜 계속 하지 않았을까. 그 흔한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한 번 나가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자존심이라는 내부 사정과 노래방 문화라는 외부 사정 때문이었다. 사실 김 씨도 제대 했을 당시엔 음악을 해야 되지 않나 생각을 했다. 싱어송라이터 꿈도 계속 꿔왔다. 한때는 민중노래 못 부르게 하면 안 부르겠다는 조건으로 하루 30분 노래하고 40만원 수입(공무원 월급이 60만원이었던 시절이다)을 올리기도 했고, 속리산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두 타임을 부르고 200만원 출연료를 받는 등 잘 나갈 때는 노래만 불러 한 달에 800만원까지 수입을 올린 적도 있다. 그 시절엔 아무리 궁해도 전국노래자랑에는 나가지 않겠다는 대학가요제 출신의 프라이드가 있었고 실제 그 프라이드는 사회에서도 통용됐다. 그렇게 2002년도까지 김 씨는 노래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했던 가수 활동을 꾸준히 해나갔다. 어느 순간엔 해바라기의 이주호가 유익종이 나간 자리를 그에게 제안한 적도 있지만 민중가수로서 자존심은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하게 했다. 가슴 한 구석에 여전히 남아 있던 젊은 시절 날선 패기가 김 씨를 점점 주류에서 멀어지게 한 것이다.

 

'이 밤에'가 수록된 이성원의 데뷔작. 김 씨는 인터뷰 때 이 노래도 부르며 처음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 밤에'가 수록된 이성원의 데뷔작. 김 씨는 인터뷰 때 이 노래도 부르며 처음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노래하며 일하며 서울 잠실과 명동, 경기도 마석 등을 거친 김 씨는 마침내 지인의 권유로 진주에 정착한다. 김 씨는 진주에 와서도 계속 노래를 했다. 바로 하대동 탑마트 지하에 있던 '휴라이브'에 오픈 멤버로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2008년도까지 이어진 이 생활에서 그는 무대 생활에 회의를 느꼈다. 시민들 삶 속에 확고히 자리 잡은 노래방 문화가 음악을 '듣는 것'에서 '부르는 것'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무대에 선 가수의 노래를 메인 요리 대신 양념처럼 여기게 했고, 어떤 때는 "네가 조용필처럼 유명한 사람은 아니잖아"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듣도록 만들었다. 김 씨에게 라이브 바는 어느 순간부터 오부리('즉석 반주'를 뜻하는 외래어) 바처럼 여겨졌다.

"보통 라이브 바에선 메인 공연이 끝나고 11시 이후쯤 손님들이 노래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테이블만 스물여덟 개였으니 자신들이 한 곡 부르려면 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애초에 시스템이 살아남기 힘든 구조였던 거다. 그러다 한 번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손님에게 '아요('이봐'를 뜻하는 진주 방언), 너보단 내가 낫겠다'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그럴 땐 너무 자존심이 상해 장비 다 끄고 무대 밑으로 뛰쳐나가 주먹다짐도 했다. 물론 나중에 손님이 딸기 등을 가져와 화해하기는 했지만(웃음). 그런 식으로 사천에서도 공연을 하며 7년 가까이를 지냈다."

물론 김 씨는 지금도 노래를 부른다. 자기가 운영하는 하대동 식당에서 손님들의 신청곡도 받아 불러주고, 때때로 통기타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과 교류도 한다. 한편으로 그는 말로만 '문화도시' 운운하는 진주에 음악가를 꿈꾸는 청소년들을 위한 오픈 무대도 세우고 싶다. 천혜의 자연 환경과 지리적 여건을 갖춘 진주를 지역 대중음악의 메카로 만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경험도 있고 복안도 있지만 진주에선 아직도 외부인일 뿐인 그에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또 하나 질문. 왜 그는 자신의 곡을 만들지 않을까. 요즘 같이 스스로를 펼쳐 보일 수단이 많은 세상에서 그는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가. 당사자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럴 생각 없음". 이유는 이미 기존 음악들이 너무 좋은데 자신의 자작곡까지 보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비슷한 걸 짜내며 만들 바엔 아예 만들지 않겠다는 게 그의 의지였다.

"음악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것이고 또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김 씨는 나카부치 쯔요시의 'Run'과 윤태규의 '마이웨이'를 함께 불렀다. 마침 세상은 유희열과 사카모토 류이치, 이무진과 세카이 노 오와리 사이에서 표절 의혹을 두고 요동치고 있는 중이다. 부르는 음악과 들려주는 음악. 이날 김 씨는 그 사이에서 자신만의 음악 세상을 찾고 있는 듯 보였다. 굳이 자신이 만들진 않을지언정 원하는 때 언제든 부를 수만 있어도 그 나름 행복한 가수 인생인 것이다.

글/인터뷰 김성대(대중음악평론가)

사진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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