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근자에 돌아가신 분의 살림을 정리하는 일을 우연히 하게 되었습니다. 생전에 딱 한 번 뵌 적은 있지만, 가까이서 유심히 보지 않았던 터라 그분의 성정이 어떠한지는 도통 몰랐는데 유족과 함께 살림 정리를 하면서 자연스레 고인의 속살을 엿보게 된 것입니다. 아 물론 노인분의 살림이라 야무지게 정돈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어떤 것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에 신경을 많이 쓰며 사셨는지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가 누구였던지 간에 누군가의 한 생애를 돌아볼 기회를 가지는 것은 그 또한 사색의 좋은 계기가 되곤 합니다. 결국에 나를 돌아보게 되니까요. 그래서 청소일의 고단함으로만 느껴지지는 않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구점숙(경남 남해)
구점숙(경남 남해)

그분은 오래전 농촌에서 지방의 작은 도시로 이주한 분이셨기에 아파트 베란다에 두기에는 좀 무겁고 크다 싶은 장독을 몇 개나 갖고 계셨습니다. 아파트에서는 냄새 때문에 관리하기 힘들었을 간장 된장 담기를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챙기셨나 봅니다. 암요, 장이야말로 살림의 원천이 아니던가요. 또 다용도실에는 큰 싸리채 광주리도 몇 개나 있었습니다. 아마 봄에는 고사리를 말리고 여름에는 아주까리 잎을, 가을에는 또 고구마 줄기를 말리셨겠지요. 식성은 곧잘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뒷 베란다 선반 위에 무말랭이며 이름 모를 마른 나물들이 봉지마다 담겨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싱크대 아래쪽에는 매실청, 매실주를 종류별로 담궈두고서 살림에 요긴하게 쓰셨나 보고, 냉장고에 있는 새우젓, 멸치젓, 창란젓 등으로는 온갖 식재료의 맛을 살리셨나 봅니다. 그러니까 고인은 먹는 것을 매우 귀하게 여기고, 그것 중심의 살림을 하셨던 게지요. 암만요, 먹는 것이 제일 소중한 것이고 그것을 살림의 제 일 순위에 두는 것이 궁극의 지혜인 것이지요.

그러고 또 고인은 몇 년이나 지난 달력을 도르르 말아서 냉장고 위에 몇 개씩이나 보관하고 계셨습니다. 냉장고 위가 그런 것들 보관하기에 안성맞춤인 것을 사람들은 어찌 그리도 잘 알까요? 그러니까 사람은 다르면서도 또 한참은 비슷하다니까요. 그것도 코팅이 안 된 종이달력으로 말입니다. 종이달력은 큰살림을 살아본 사람들의 필수품이지요. 주로 제사음식이나 잔치음식 준비할 때, 전이나 생선구이 등을 담는 광주리에 밑받침으로도 쓰이고 덮개로도 아주 요긴하게 쓰이니까요.

싱크대 상단 장에는 각종 용기들을 모아 두셨는데, 그곳에서 생각이 오래도록 머물렀습니다. 주로 플라스틱 그릇들이 많았는데, 시중에 판매하는 반찬 용기도 있었지만, 죽이나 찜을 담는 일회용 포장 용기까지 상당 부분 모아두셨습니다. 그렇지요. 그 용기들은 재활용하기에도 뭔가 못 미덥고, 그렇다고 버리기에는 조금 아깝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재활용코너로 가는 플라스틱 그릇들이 고인의 눈에는 얼마나 아깝고 한심하게 여겨졌겠습니까? 고인은 언젠가는 쓰일 그 용기들을 버리지 않고 알뜰히 모아두셨던 것입니다.

당신을 한참이나 고민하게 했던 무수한 플라스틱 제품들이 차고 넘칩니다. 쓰임이 유효한지 끝났는지도 모를 무수한 용기들이 집집마다 망설임의 중간단계에서 쓰이지도 버려지지도 못한 채 벽장 구석을 채우고 있는 것이지요. 그 덕에 참 편리하게 살아왔지만, 어느새 더 큰 고민을 던집니다. 연간 3억7,000만 톤의 플라스틱이 만들어진다니 1950년대에 비해 190배가 증가했다지요. 게다가 이 플라스틱은 만들어진 후, 단 하나도 삭아 없어진 적이 없다는 말이 꽤나 무섭게 들립니다. 혹자는 지구온난화의 원인으로 플라스틱도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지난해 겨울부터 이 봄까지 죽 이어지는 가뭄에 생각이 더 깊어집니다. 기후위기가 더 심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먹거리를 가장 중심에 놓고서, 전통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사셨던 보통의 당신이 남긴 삶의 궤적에서 묵직한 시대의 고민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당신이 옳았던 것입니다.

* 이 기사는 [한국농정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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