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D.P.의 한 장면
드라마 D.P.의 한 장면

드라마 D.P.의 키워드로 많은 사람들이 <방관>을 말한다. 방관 다음으로 우리를 사로잡은 말은 죽기 직전 조석봉 일병의 말,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지>였던 것 같다. 이는 우리 사회에 던져야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로 간주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나는 다른 데서 더 깊고 아픈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총을 들고 거의 미쳐가는 중인 조석봉 일병이 자기를 학대한 황장수 병장을 학대 장소로 데리고 가서, <나에게 왜 그랬어?>라고 묻는 장면에서, <잘못했다>, <미안하다>, <죽은 듯 살겠다> 고 애원하던 황병장이 어렵사리 꺼낸 진실의 한마디 :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

이 말은, 약하고 착해서 당하는 자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가해자들이 가해하는 가장 완벽한 이유이다. 그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이유로, 어떤 사람은 자기의 삶을 포기할 만큼의 절망을 주는 그런 행동을 한다. 이것은 참 잔인하고도 무심한 진실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정말 많은 불행과 비극이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부모라는 것이 무엇인지, 부모는 아이에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 준비 없이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자기의 자녀에게 화를 내고, 손찌검을 하고, 내버려 두고, 냉정하게 대하는 일들. 학교에서 자기 또래 아이들을 이름으로 놀리고, 키 작다고 못 생겼다고 놀리고, 몇몇이 모여서 놀리다가 때리기도 하고, 때려도 아무 일 안 일어나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지속적으로 때리고, 패거리 만들어서 힘 과시하는 일들. 결혼하여 남편이나 아내가 되었는데, 돈 없다고 무시하고, 까분다고 눈을 부라리고, 집안 일 나몰라라 하고, 그래도 상대가 참으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고> 하던 일을 더 잔인하게 지속한다.

극악무도한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다. 그러한 폭력은 말할 필요도 없고, 정서적 방임과 학대 역시 가랑비에 옷 젖듯이 매일 매일 한 사람의 기질과 성격에 스며든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결국 부모의 골칫덩어리가 되고, 아주 나쁜 경우에는 부모에게 복수한다. 그때서야 그 부모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에게 유명한 학교 폭력, 그 가해 주체는 자기 행동이 자기의 삶에 흠이 될 줄 모르지만, 어느 날 피해자의 ‘미투’로 지금까지 이룬 모든 사회적 성공이 물거품이 되고 말기도 한다. 만약 그가 스타라면 그에게 열광하던 팬들은 냉정하게 그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 때 우리는 그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황혼에 이혼 소송당하는 사람들, 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몰랐던 사람들, 모두 뒤늦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프랑스에서 만 두 살부터 만 여섯 살까지 아들을 키운 적이 있다. 만 세 살부터는 공교육이 시작되고, 부모는 등교와 하교 시에 아이의 손을 잡고 교실까지 바래다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부모들도 서로 잘 알게 된다. 오래된 6층짜리 아파트에 살았던 나는 정사각형 라인을 따라 지어진 아파트로 둘러싸인 정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방과후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루는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이름을 두고 놀리는 말을 했다. 놀린 아이의 엄마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On ne se moque pas de son nom!”

나는 이 말과 그 날의 풍광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이 말은 대략 다음에 가장 가깝다.

“이름으로 놀리는 거 아니야!”

그러나 뜻은 이 뜻이 맞지만, 사실 더 분석해봐야 할 의미들이 이 문장에 들어있다. 그 엄마는 자기의 아이가 이름으로 다른 아이를 놀리는 행위에 대해, “놀리면 안 돼”라는 금지나 명령을 한 것이 아니다. 이 엄마가 쓴 문장의 주어는 불어에만(내가 아는 언어들, 한글, 영어, 불어 중에) 존재하는 On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3인칭이긴 하지만 비인칭이기도 하며, 영어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 영어의 비인칭은 It을 쓰지만, On이라는 불어는 인격적인 비인칭이며, It에 해당하는 불어는 Il로서 따로 있다. 이 단어는 논문을 쓸 때 자주 등장하는 인칭으로서, 영어라면 보통 We나 They 등을 쓰는데, On이라는 불어는 <우리>도 아니고 <그들>도 아니다. 3인칭이지만 <그>도 아니다. 그와 그들, 우리에 해당하는 불어는 각각 따로 존재한다[Il, Ils, Nous]. 논문에 쓰는 문장의 내용은 사실 내가 생각해서 내 이름으로 내가 쓰는 것인데도 <나는>이라는 주어는 쓰지 않는다. 논문은 내가 쓰지만 최소한의 객관성을 갖추어야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영어권 문화와 전통은 그 객관성을 <그들They>이나 <우리We> 정도로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은데 프랑스 사람들은 그들이나 우리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어떤 보편성을 표현하고자 On 이라는 3인칭 비인격 주어를 만든 것 같다. 이름으로 놀리면 안 된다고 주의를 준 그 엄마의 표현에 이 On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이 나에게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우리는 이름으로 사람을 놀리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문장은 거의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아무런 조건이 없는 보편적인 명령과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아이 엄마의 주관적인 명령도 아니고, 그 엄마가 속한 공동체의 규범도 아니고, 어떤 법전에 있는 실정법도 아닌, 그런 보편적 명령인 것이다.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이런 보편적인 정언명령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하늘에서 어느 날 툭 떨어진 보편명령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합의한 보편적인 명령 말이다. 한 친구가 자살기도를 할 정도로 절망했는데도 아직까지 <장난이었어>라는 말이 통하는 사회는 병이 들어도 한참 병든 사회이다. 하나의 사회가 성숙하다는 것은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죄악이 없다는 것, 어떤 일은 해도 되고 어떤 일은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명확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법은 사회적 합의에 따라오는 것이고, 이러한 법은 예외없이 지켜져야 그 사회적 합의가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병은 사회적 합의에 아직 이르지 못한 채 일방적인 목소리와 힘에 의해 법들이 마구잡이로 제정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법만능주의], 꼭 지켜져야 된다고 믿었던 법이 커다란 악행의 면죄부가 되기도 한다는 점[법은 좀도둑만을 잡는다]에 있다. 이런 사회에 사는데 어떻게 건전한 상식과 건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회적 합의에 이르고, 이 합의에 따른 법이 제정되고, 그 법을 예외없이 집행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고,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 오랜 시간을 우리 자신에게 주는 것, 어쩌면 이것이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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