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교에서 거의 내 삶의 전부를 보내고 있다. 학생으로, 교사로 살아오면서 최근 들어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가 소통(疏通)’이다. 의사소통의 준말이다. 의사가 서로 잘 교환되고 있으며 그것이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 것을 의미한다. 참 좋은 말이다.

아마도 2010년 전후로 일부 세력(인터넷 커뮤니티 및 인터넷 미디어 등에서)들이 '소통'이라는 구호를 사회 여기저기에 들이밀기 시작한 것으로 기억한다. 문제점은 이 소통이라는 단어가 매우 빠른 속도로 교조화되는 바람에 '소통'을 조금이라도 하지 않으면 즉시 불통의 낙인을 찍고, 낙인에 대한 대가가 갈수록 무겁고, 동시에 전 방위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이다.

문제는 또 있다. 나의 짧은 경험에 따르면 소통을 강조하는 단체, 혹은 개인의 모습은 사실 불통에 가깝다. 학교 현장에서 이 소통을 강조하는 사람은 구조적으로 교장, 교감들이다. 일반 교사들은 소통을 강조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학교 조직의 특성으로 볼 때 정보는 항상 위에서 아래로 향하기 때문에 때론 알고 싶지 않는 정보도 있다. 반대로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정보는 곧잘 차단당하고 만다. 대부분 이 단어는 교장, 교감들의 불통을 엄폐 혹은 은폐하기 위해 사용할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소통'을 강조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거의 '불통'에 더 가까울 가능성이 많다.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존중이라는 말도 역시나 자주 쓰인다.

존중높여 귀중히 대하다로 풀이되는데 역사적으로는 신분제 사회에서 자신보다 낮은 신분에 있는 사람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어, 현대 신분 없는 사회에서는 자신과 마주하는 모든 상대방을 이렇게 대해야 한다는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역시 좋은 말이다.

그런데 요즘 거리에서 보는 공공기관의 목표, 학교의 교육비전 등에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앞서 이야기한 소통과 더불어 존중이라는 단어가 우리 시대의 핵심 키워드가 된 듯하다. 정말 공공기관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또 귀중히 대할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나라의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자들은 이런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 결국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역시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챙겨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소통의 본래 의미도 아니고 동시에 존중은 더더욱 아니다.

학교 역시 비슷하다. 교장, 교감이 존중을 강조하는 것은 살짝 웃기는 일이다. 자신의 자세를 낮추면 그것으로 존중이요 소통이다. 이야기가 나온 참에 공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공정함이란 공평하다는 말과 올바름이라는 말의 두 가지 뜻이 포함된 말인데 우리는 공평함이 곧 올바른 것이 아닌가 하고 대부분 생각한다. 하지만 공평하다는 말의 뜻은 칼로 무 자르듯이 싹둑 잘라버리는 그것이 바로 공평함이다. 거기에는 배분적 정의가 없다. 오로지 평균적 정의만이 있는, 그래서 로마 시대 법학자 울피아누스가 정의(正義)’정의(定義)’한 것처럼 노예에게는 노예의 것을, 평민에게는 평민의 것을, 귀족에게는 귀족의 것을 주는 살벌하고 무표정하며 엄청난 불평등을 감수해야만 하는 '평등'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올바른이라는 말을 넣어야 비로소 우리가 바라는 공정이 된다. 그럼 무엇이 올바른것인가? 그것은 기회의 개방이요, 균등인데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기회의 포기에 대한 적절하고도 이성적인 보상까지 포함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언제나 약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평등이 공정에 더 가깝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정을 쓰는 사람들 대부분은 거의 공정하지 않아 보인다. 현 정부의 국정 지표가 바로 이 공정이었는데 집권 4년을 넘긴 지금 과연 우리 사회는 많이 공정해 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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