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다음 주 월요일엔 절대로 술을 마시면 안 돼요. 알았죠.” “, 알았어. 그래 알았다고.” 며칠 전부터 보름이는 나만 보면 다음 주 월요일 술 마시지 말라는 다짐을 받고 있었다. 화요일에 보험회사에서 간호사가 건강검진을 나온다는 거였다. 건강검진이래야 심전도검사와 혈압검사에 소변과 혈액을 채취하는 게 전부일 거라 했다. 주사공포증이 있어서 혈액채취라는 말에 마음이 찜찜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건강하시지만 그래도 연세가 있으시니 실손보험이라도 하나 들어야지 않을까 해서요.” 며칠 전부터 보름이와 아내가 상의를 했다면서 보험가입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나는 보험이라는 제도 자체를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에 지금껏 보험사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그러다 재작년에 농협 조합원이 되었고, 농협에서 조합원에게 의무적으로 가입해주는 농업인 상해보험에 든 것이 보험과 맺은 첫 인연이었다. 아주 오래 전에 아내가 나 몰래 소액 상해보험 같은 것을 넣었다가 핀잔을 듣고 얼마 가지 않아 해지한 기억이 떠올랐다.

실손보험? 그게 뭔데?” “그냥 보험금 내면 병원비 받는 정도예요.” “보험금은 얼만데?” “매달 삼만 원 조금 넘어요. 사만 원은 안 되고.” “뭐 그렇게 싼 보험료가 있대?” “당신 아직 만으로는 예순다섯 살이 안 되어서 싸게 된다네.” 아내가 곁에서 거들었다.

몇 년 전 아내는 보험에 들었다. 보험금이 십만 원쯤 되는 보험이었다. 쯔쯔가무시에 걸려 며칠 입원을 했을 때도, 대상포진에 걸려 몇 번 병원을 들락거릴 때도 보험사로부터 진료비와 입원비를 받았다고 했다. 그때마다 나도 보험이라도 하나 들까하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게다가 몸도 전 같지 않고, 보험료도 크게 부담이 안 되고, 보름이까지 나서서 저리니 안 들래야 안 들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김석봉 농부
김석봉 농부

어제는 치과에 가서 이빨 두 개를 뽑았다. 왼쪽 아래 어금니와 사랑니를 뽑았다. 마취가 신통치 않았는지 몹시 아팠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한동안 온몸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이빨 뽑은 자리는 임플란트를 심어야 한다고 했다. 내년이면 만으로 예순 다섯이라 그때 보험 적용받아서 할 거라 했더니 아래 이빨이 없으면 위 이빨이 내려앉아 또 손을 봐야할 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플란트 할 처지도 안 되고 내년이면 보험이 되는 마당에 굳이 지금 해야 하나 싶었다. 병원문을 나서는데 어질어질 거려 잠시 벽에 기대 서있었다. 왈칵, 형용할 수 없을 상실감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병원에 버려두고 온 내 이빨이 어른거렸다. 의료폐기물에 뒤섞여 소각되어 연기처럼 사라지겠지. 이날까지 이 몸을 만들어온 이빨이라는 생각에 몹시 우울했다. 날씨마저 많이 추웠다.

내가 이빨을 뽑는 사이에 아내는 한의원에 누워있었다. 장침을 맞고 왕뜸을 뜬다고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온몸이 찌뿌듯하다고 틈만 나면 한의원을 찾았다. 집에서 가끔 등에 부항을 떠주었는데 등 곳곳에 피멍울이 짙게 어렸다. 이제 막 환갑 지난 나이건만 몸은 많이 상해 있었다. 부항기를 떼어낼 때마다 불안하고 불길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고단하게 이어온 아내의 삶의 여정을 바꿔놓을 수 없듯, 누더기로 변해버린 아내의 몸도 결코 되돌려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한의원을 나온 아내는 의료기 상회에 간다며 바쁘게 길을 건넜다. 복숭아뼈와 발목 쪽이 아프다면서 발목교정기 같은 것이 있는지 알아본다는 거였다.

실손보험인가 그거 말고 다른 보험은 없어?” 저녁밥상을 물리고 보험얘기를 꺼냈다. 하루 종일 생각해둔 말이었다. 뽑아버린 이빨 때문인지 내가 듣기에도 내 말이 어눌하게 들렸다. “왜요. 다른 보험 어떤 거요?” “아니. 만기 되면 적립금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그런 보험. 차라리 내가 알아볼까?” 내 목소리는 조금씩 퉁명스러워지고 있었다.

화요일이면 간호사 올 텐데. 실손보험 계약은 어떡하고요.” “계약이야 그만두면 되는 거고. 아니, 나는 그저 내가 편하게 알아보고 내가 보험 들든지 말든지 하고 싶다는 거지.” 보름이는 난감해하고 있었다. 보험사와 이미 일을 많이 진척시켜온 터라 담당설계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클 거였다.

사실 처음 보험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그러려니 했었다. 하루 이틀 날이 가고 마침내 건강검진을 앞두니 괜한 서글픔 같은 것이 가슴 속에 자리 잡는 거였다. ‘내가 나이를 제법 먹었구나. 그러니 며느리도 내 노후를 위해 뭔가 준비를 하려는 거지. 늙은 나이에 덜컥 큰 병이라도 얻게 되면 없는 살림에 저들 내외가 많이 힘들어 하겠지.’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래. 그렇게 되면 내가 얼마나 귀찮은 존재가 되겠어. 그나마 실손보험이라도 들어 있다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되겠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퍼뜩 버려진 듯 홀로 살아가는 이웃 노인네들이 생각나고 요양원으로 떠난 김씨와 박샌의 그 초라한 뒷모습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가족이 거두지 못하는 노인의 삶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주변에 귀찮은 존재에 불과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생명보험이나 뭐 이런 거를 하나 더 들까?” 나는 마침내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그런 것에라도 기대면 나이를 먹어가도 덜 불안하고 가족에게도 덜 불편할 거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마음마저 이리 가난해서야 쓰나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웃 노인들의 삶의 끝자락이 가슴에 박혔다.

뭐 그런 거에 마음을 쓰셔요. 정 그러시다면 차라리 적금 같은 걸 넣으시지. 필요할 때 쓰기도 좋잖아요.” “그래. 그러면 되겠네. 생명보험은 자기를 위한 보험이 아니거든.” 보름이와 아내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한마디씩 던졌다. 몹쓸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민망하기도 해서 텔레비전 쪽으로 돌아앉았다. 텔레비전에선 내일부터 날씨가 봄날처럼 포근할 거라고 한다. 설날 연휴 내내 그럴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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