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식이 있는 날, 큰아이는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기침을 심하게 하며 목이 갑갑하다고 울어댔다. 대충 하던 일을 수습하고 부랴부랴 동네병원으로 향했다. 짧은 거리에 별의별 생각을 다 한다. 물론 코로나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지만 진짜 걱정은 코로나의 병증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아이가 당할 육체의 고통보다는 코로나 확진자에게 따라붙게 될 신상털이와 터부시가 더 걱정스러웠던 탓이다.

사실 병이야 적절히 치료만 한다면 확률로 볼 때 크게 우려할 것이 없다. 그러나 확진자에게 가해지는 신상털이와 집단 따돌림은 아이나 우리 가족에게 오래고 오래도록 쓰린 마음의 상처로 남을 확률이 아주 높았다. 그래서 병증보다는 확진자라는 낙인이 더 무섭게 느껴진 것이다. (다행히 아이는 코로나가 아니었다.)

지자체발 문자가 잦은 요즘, 문자가 오면 아내는 또 어디서 확진자 나왔나라며 휴대전화기를 들여다보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테다. 여기까지는 팬데믹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긴다고 쳐도 이것이 결국 잘 마른 섶에 불씨를 던진 꼴이 되고 만다. 집단지성의 발로라고 적당히 비아냥거릴 수준이 아니다.

요즘은 페이스북, 카페, 밴드 등을 중심으로 지역커뮤니티가 무척 잘 꾸려져 있다. 모 동네에 확진자가 나오면 그곳이 속한 시군 지역 커뮤니티가 활기를 띈다. 물론 일부 극성적인 사람들의 행동이지만 곰방대를 문 셜록 홈즈가 생각날 정도의 기막힌 추리들이 간간이 등장하고 나면 확진자를 숫자로 던진 지자체 나름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한 개인의 신상이 탈탈 털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집요한 추적 뒤에는 모종의 집단심리가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확진자라는 결과는 반드시 그 확진자의 잘못된 행위에서 비롯되었으리라는 전제가 그것이다. 그렇게 잘못된 행위를 전제하는 내면에는 자신이 속한 비확진자라는 영역이 어렵게 방역수칙을 잘 지켜내고 있는 선한 행위의 보상이라 여기는 심리가 자리 잡고 있겠다 싶다.

따지고 보면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이 운이 좋은 것일 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신이 인간의 특정한 행위를 벌하기 위해 내린 형벌 따위가 아니니까. 인간에게 낯설고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일 뿐이다. 특정 종교를 비난하면서도 단지 전염병에 불과한 것을 미신 속 형벌처럼 여기는 세태는 온당한지 자문해 봐야 한다.

예전에 우리는 한센병 환자들의 무리가 마을에 들어서면 돌팔매로 쫓아내곤 했다. 원시적인 혐오라 할 만한 일이었다. 거리두기나 소위 K방역의 기원이 어쩌면 거기서 시작된 건지도 모를 일이다만.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면서 한센병에 대한 무지가 깨어지자 이런 혐오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또 잘 모르는 전염병 앞에서 이와 비슷한 전근대적인 원시적 혐오를, 그것도 최첨단의 통신망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또 다른 돌팔매질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되리라. 이런 퇴행은 불행한 일이다. 혐오로 마음에 남을 상처는 코로나 병증과는 다르게 세월이 가도 잘 아물지 않는다.

박훈호 자유기고가
박훈호 자유기고가

론 일부 단체, 교단에서 벌이는 집단적인 방역수칙 거부사태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이런 행위에 대해서는 적절한 행정적 조치가 있으면 된다. 하지만 감염 자체를 죄악의 결과로 인식하는 태도는 비과학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가학행위에 가까움을 알아야 한다. 병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

본인이 감염되면 어쩔까. 두려워하는 감정 속에 전염병의 통증보다 집단의 따돌림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 짙게 깔려있다면 그 사회는 이미 정상이 아니다. 사회집단은 서로를 보호하고 보호받기 위해 만든 공동체다. 그런 집단 속에서 불안을 스스로 확장하고 강화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지 않아도 아픈 시절, 서로가 서로에게 불필요한 감정의 상처까지 남길 필요는 없다. 거리두기는 물리적 공간에 한정해 두자. 다독이는 마음들이 더 소중한 스산한 시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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