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역사, 사대 아닌 자주

박현채를 만나고 한국이불행사회가 된 근본적 원인을 찾았다. ‘민족경제론을 주창한 박현채의 역저 한국경제구조론만 한 번 잘 읽어보면 된다. 그 해방 전후사 부근을 두 눈 부릅뜨고 꼼꼼히 살펴보니 손아귀에 물컹하고 잡히는 게 있다. 바로 국가관과 민족애와 영혼이 없는 공무원들의 적폐다.

그러니까, 오늘날 불행한 한국사회는 반민족적 친일파·숭미파 관료체제의 구조악으로부터 발아됐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총독부 근무자 출신의 친일파, 지주, 기업가 출신의 미국, 영국 등 유학파, 그리고 기독교 미션계 학교를 다닌 기독교 등 이른바 미 군정 관료체제 3인방이 공복은커녕, 우리 민족 공공의 적이었다.

박현채에 따르면, 일제는 1930년대부터 순수한 농민들의 소작쟁의, 순결한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를 모두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이라며 매도하고 잔혹하게 탄압했다. 이때부터 반공은 일제의 주된 선전자료로 악용됐고 수많은 기회주의적 친일단체들이 반공을 표방하며 새로 조직됐다. 이들은 악의적으로 좌익을 점차 항일과 동의어로 간주하고 설파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뒤틀린 의식은 미국인들의 군정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미군정의 정치기반은 반공이라는 군사적 논리와 냉전논리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반공으로 재미를 톡톡히 본 친일파 등 식민지 지배동조세력과 미군정은 서로 어제의 적이 아닌 오늘의 동지로서 동업자관계를 이루게 된다. 이때부터 반공’, ‘빨갱이’, ‘종북은 오늘날까지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친일·숭미파들에게는 저항 세력, 혁신 세력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전가의 보도 같은 고성능 무기로 작동하고 있다.

 

제주4.3항쟁기념관의 ‘아직, 아무런 역사도 기록하지 못한’ 백비(白碑). [사진=정기석]
제주4.3항쟁기념관의 ‘아직, 아무런 역사도 기록하지 못한’ 백비(白碑). [사진=정기석]

 

한국현대사, 일제미제 앞잡이들의 야사(野史)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등 민족주의자들의 애국적 활동은 미국의 고정된 선입견에 의해 공산주의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이는 민족주의적 지하세력의 심판과 보복을 두려워 한 일제에 의해 강조되고 악용된다. 그래서 해방 직후 남한에서 일본과 미국은 민족주의자는 곧 공산주의자라는 공동의 반공 이데올로기로서 마치 동맹국처럼 의기투합한다.

이때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승전국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결정적인 전문을 띄운다. “공산주의자와 선동가들이 해방 후 조선의 평화와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며 치안유지 권한을 요구한다. 이에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기다렸다는 듯 즉각 회답한다. “미군이 책임을 떠맡을 때까지 38선 이남의 한국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기구를 보전할 것을 지시한다. 두 제국주의자들 사이에 식민지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놓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호호혜적 거래가 성사된 것이다.

결국 조선은 해방됐지만 일본은 물러가지 않았다. 겉으로는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나 친일파는 전혀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경찰의 훈련을 받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한국인 85%가 미 군정의 경찰로 살아남았다. 정부가 수립이 되고나서도 한국 전체 경찰의 50%는 독립군과 애국지사를 때려잡는 데 앞장 선 일본경찰의 앞잡이들로 채워졌다.

행정부 공무원들도 친일파 일색이었다. 일본인 밑에서 훈련받고 일본에 충성을 다 한 친일파 관리들이 새 행정부의 대다수와 상부를 차지했다. 그들 친일파 공무원을 제외한 미 군정의 최고위간부급은 영어회화능력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던 애국자들, 민족주의자들은 여전히 풍찬노숙 처지였다. 어이없게도 친일·숭미파가 해방된 조국의 행정부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미 군정은 이들 친일·숭미 공무원들을 앞잡이이자 끄나풀로 요긴하게 활용했다. 이들은 미 군정을 대신해 일본인 공장 노동자자주관리를 부정하고, 민족주의자들이 자주적으로 주도한 농지개혁을 부정했다. 미 군정은 이들의 노고와 충성심에 보상을 아끼지 않았다. 통역, 매판 상인자본, 일본농장 마름 등에게 권력과 재산을 쥐어주며 독립주권과 민족경제의 씨앗을 압살하도록 채찍질과 당근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해방 직후 한국은 사실상 미국 군인들이 아니라 이른바 미 군정 관료체제 3인방손아귀에 들어간다. 총독부 근무자 출신의 친일파, 지주, 기업가 출신의 미국, 영국 등 유학파, 그리고 기독교 미션계 학교를 다닌 기독교도들이다. 그리고 해방 7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조국을 배신한 '미 군정 공무원 3인방들이 국정과 행정을 농단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된다. 오늘날 '신식민지 반봉건사회' 같은 '헬조선', ‘불행사회, 한국의 악의 고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끊어야 한다.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

2의 반민특위로 역사를 바로 세워야

물론 지금은 당시의 일제 앞잡이, 미제 끄나풀들은 거의 없다. 거의 다 죽었다. 그러나 그들의 물질적, 정신적 유산은 멀쩡히 살아있다. 그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들을 가리켜 친일파또는토착왜구(土着倭寇)’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이태현이 쓴 정암사고라는 산문집에서 '토왜(土倭)’라는 말은 친일 부역자란 뜻으로 사용됐다.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는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이 실려 토왜를 얼굴은 한국인이나 창자는 왜놈인 도깨비 같은 자,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인종으로 규정하고 이렇게 4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하나, 뜬구름 같은 영화를 얻고자 일본과 이런저런 조약을 체결하고 그 틈에서 몰래 사익을 얻는 자. ,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는 고위 관료층. 암암리에 흉계를 숨기고 터무니없는 말로 일본을 위해 선동하는 자. , 일본의 침략 행위와 내정 간섭을 지지한 정치인, 언론인. 일본군에 의지하여 각 지방에 출몰하며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자. 친일단체 일진회 회원들. , 저들의 왜구 짓에 대해 원망하는 기색을 드러내면 온갖 거짓말을 날조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독을 퍼뜨리는 자. 토왜들을 지지하고 애국자들을 모함하는 가짜 소식을 퍼뜨리는 시정잡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1948년부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했다. 이들 토착왜구, 일제 부역자들을 색출, 처벌하려던 반민특위는 바로 다음해 이승만 정권 토착왜구들에게 역공을 당해 자취를 감추고 만다. 반민특위와 관련법이 폐지되자 토착왜구들은 다시 한국사회 주류로 등장, 민족주의 인사들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독재정부를 세우는 등 한국 현대사를 농단한다. 이처럼 뒤틀린 한국 현대사는 2의 반민특위로 바로 세울 수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마치 천형 같은 인류의 숙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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