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민칼럼]1920년대 진주의 풍경

또다시 진주비빔밥과 진주냉면에 대하여

2025-06-09     황규민

2025년 5월 27일, <판타레이>와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의 저자 민태기 박사의 강연이 진주문고에서 있었습니다. 강의 타이틀은 '진주가 만난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을 만난 ‘진주’를 주제로 민태기 박사가 강연을 하고 있다. 

그는 강연전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립니다.

"다음주 화요일 27일 저녁에 고향 진주에서 강연이 있습니다. 아마 진주분들도 1923년 여름 진주에서 상대성이론 강연이 있었다는 사실은 생소할 텐데요, 이 무렵 진주에서 시작된 어린이 해방 운동이 같은 해 전국적인 어린이날 행사로 발전하고, 같은 시기 진주를 탐방한 천도교 인사들이 기록한 100년 전 진주 비빔밥 이야기를 통해 모던 진주의 모습과 한국 근대 과학사 이야기를 연결해 볼까 합니다."

강의 내용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강사는 어릴적 아버지를 따라 '천황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먹은 기억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주냉면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를 진주에서 초ㆍ중ㆍ고교를 보낸 저의 기억과 동일합니다. 대학시절인 1980년대에도 진주냉면에 대한 기억과 경험은 전혀 없습니다. 객지 생활을 정리하고 진주에 다시 온지 한참인 2000년대 초가 되어서야 진주냉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민태기 박사는 강연 중,  "1923년, 천도교 인사가 진주 방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도착 당일 비빔밥을 먹었는데 다음날도 비빔밥을 먹었다.'는 내용이다"라고 합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진주비빔밥 식당이 1927( 혹은 1915)년 부터 시작했다고 하니, 이미 그 전부터 여러 식당에서 비빔밥 장사를 하고 있었으며 외식업으로 대중화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냉면은 그러하지 못한듯합니다. 냉면은 준비하기가 쉽지않은 음식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교방 연향 음식으로 또는 벼슬아치의 음주가무 후 야식, 해장식 등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요정 등 고급 음식점에서 왜인이나 일부 부유층이 주로 먹었던 음식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25와 1960년대 중앙 시장의 화재로 진주냉면은 사라졌습니다. 2000년대 갑자기 나타난 진주냉면은 민과 관의 노력으로 새롭게 복원된 것입니다.

진주비빔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주비빔밥의 유래에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설' 등과 함께 '진주 강씨 제사 음식설'도 있습니다.

진주 강씨 시조는 고구려 명장 '강이식' 장군입니다. 고려 광종은 강이식의 충절을 기려 후손 '강진'을 진양의 영주로 봉했습니다. 이때부터 본관을 진주로 하였고 거처를 진주로 옮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 강감찬과 함께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운 '강민첨'은 진주 강씨 '은열공파'의 중시조입니다. 


  고구려 제례의식 중에는 위인이나 성현의 제사에 소고기 날 것을 올리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제사를 '혈식(血食)제사'라고 합니다. "은열사에서 올리는 강민첨 장군의 제사도 혈식제사로서 생 소고기를 네모지게 반듯이 잘라 올린다"고 합니다. 


  <교방 꽃상>의 저자 박미영은 진주 강씨 은열공파 관련 인사의 다음과 같은 구술을 근거로 진주비빔밥이 진주 강씨 혈식제례에서 유래되었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제례를 마치면 소고기를 나누었고 이것이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진주 육회비빔밥의 효시가 되었다."

결국 육회비빔밥이 강씨 문중에서 시작된 반가의 내림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축우개량사업으로 개량한우 가격이 저렴해지면서 양반의 전유물에서 서민에게도 접할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반가 내림식 육회비빔밥이 시장으로 나가 대중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과학기술의 발달은 역사와 문화와 의식을 바꿉니다. 19세기 말 냉장 기술의 발달로 1877년 아르헨티나는 유럽으로 냉동 소고기를 수출합니다. 1910년 부산에 이어 인천 군산 등지에 제빙 공장이 들어섭니다. 식료품 보관을 위해 서양식 냉장 기술(제빙 기술)이 식당에 도입됩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조미료 '아지노모도(MSG)'가 들어옵니다. 뿐만 아니라 우시장과 개량한우 덕분에 당시 진주는 육회비빔밥, 냉면 같은 외식업이 활성화 대중화 될 환경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여름에도 차가운 물과 얼음을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진주 중앙시장에 정육점이 들어서게 됩니다. 정육점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백정들이 계급의식에 눈을 뜨게 됩니다.

저자 김중섭 교수는, 1920년대는 진주 지역 사회운동의 절정기 였다고 합니다. 

<사회운동의 시대> 저자 김중섭 교수는, 1920년대는 진주 지역 사회운동의 절정기였다고 합니다.  

진주는 계급운동, 사회운동, 교육운동과 민족운동 등의 용광로 였습니다. 그결과 전국 최초의 형평운동, 소년운동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1922년 9월에는 전국 최초로 '소작노동자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민족해방 인권해방 계급해방 사회개혁에 대한 열망이 휘몰아쳤습니다. 천도교청년회 진주지회, 진주학생대회, 진주야소교부인회, 진주소년회,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 소작인조합, 형평사, 일신고보 기성회, 무직자구제회, 경남도청이전방지동맹회, 동우회 (사상단체), 진주기자단 등 당시 인구 2만 명의 도시에 60여개의 공식적 사회단체가 조직되었습니다.

사천 삼천포 합천 산청 등 인근 사람들을 모이게 했을뿐만아니라 전국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육회비빔밥이 대중화될 수 있었고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 강연에 800명이 모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주의 1910년대 전후, 일본 유학생들을 통해 신문물과 사회주의 등 신진 사상이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일제의 억압과 차별적 정책으로 민족의식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시기에 발발한 1919년 3.1운동의 경험은 이후 활동가들이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연대하고 조직할 수 있는 '새로운 근대 주체 등장'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서로간의 만남이 활발해졌고, 외부와의 교류도 활성화되었습니다. 1920년대가 되면서 '사회운동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1923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형평운동, 그리고 육회비빔밥과 진주냉면이 한반도 남쪽 진주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