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민주화운동의 대부 김영식 신부 선종 2주기 추모식 열려
지난 19일 오전 11시 고성군 이화공원묘원 성직자묘역에서는 경남 민주화운동의 대부 고 김영식 신부(1949-2019) 추모미사와 추모식이 있었다.
추모식은 ‘고 김영식 신부 추모위원회’가 진행했으며 5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위원회에는 김두관 국회의원, 김정호 국회의원, 박종훈 경남교육감, 허성무 창원시장, 백두현 고성군수 그리고 시도의원들 등 정계, 학계, 교육계 인사들이 참여했다. 진주와 창원의 유월민주항쟁 단체 등 9개 민주화 관련 단체들도 참여했다.
이암스님(고성 문수암), 오태열목사(사천중앙교회) 등 다른 종교의 지도자들과 김경수 경남지사의 배우자 김정순여사가 이름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추모식은 정현찬(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박종훈 경남교육감, 김두관 의원의 추모사에 이어, 백두현 고성군수의 환영사, 허성학 신부의 추도사, 추모 시 낭독의 순으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김신부와 동년 동향인 허성학 신부의 추도사가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이에 전문을 소개한다. (진홍근 경남유월민주항쟁정신계승시민연대 이사가 정리함)
김영식 신부 선종 2주기에 듣는, 허성학 신부의 애끓는 추도사
- 신부의 길은 예언자의 길, 예언자의 길은 외롭고 위험한 길
- 김신부의 유언, 예언자의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김영식 신부는 1962년 당시 고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부를 잘해서) 부산에 있는 경남중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방학 동안에만 가끔씩 만나면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나보다 한 해 먼저 서울 소신학교(小神學校)에 들어갔고, 나는 율천초등학교와 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한 해 쉬는 바람에 한 해 늦게 대구 소신학교에 들어감으로써 고성이라는 동향의 인연에 이어 신학생 12년 동안 함께한 셈이다.
김신부는 1977년 6월에 신부로 서품되어 마산 남성동 성당 보좌신부가 되고, 나는 77년(6개월 후) 12월 28일 신부로 서품되었다. (소신학교 3년, 광주가톨릭대학교의 전신 대건신학대학 7년, 군대 3년 등 신학생 시절 12년에 이어) 다시 사제의 길을 걸어온 이후로 42년간 긴 세월 동안 줄곧 같은 노선을 걸어온 삶의 인연이 결국 54년 만에 끝을 맺고 오늘 추모식을 하는 이 자리에 섰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서로의 생각이 달라 티격태격한 일도 많았으나, 그래도 주위에 배진구 신부, 허철수 신부, 이재영 신부, 막내 장성근 신부가 있어서 서로 의지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주어서 좋았다.
신부로서의 삶이 어떤 분들은 참으로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와는 정반대의 삶(고난의 험한 삶)이라는 것을 김 신부는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다.
특히 김 신부는 지체 높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은 사람, 돈 많고 권력 있는 그런 사람들과는 철저하게 거리를 두는 삶을 살았다. 늘 입던 옷 한 벌로 다녔다. (한 번은) 신부 복장이 그게 뭐냐고 내가 말하니, 니가 나한테 옷 사주었냐고 되받았다. 심지어 포니 승용차를 단종이 될 때까지 타다가 프라이드 승용차를 구입하여 새 차라고 하면서 좋아했다. 좋다고 내 앞에서 까불어 대고 떠들어 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서 프라이드는 프라이드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1962년 당시 부산 경남중학교는 부산의 최고 명문이었다. (김영식) 신부가 되겠다고 세상의 모든 것을 초개처럼 버리고 서울 소신학교에 들어갈 때 참으로 교회의 앞날이 밝아 보였다. 그러나 신부의 길은 예언자의 길이다.
80년대 초 김영식 신부가 삼천포 성당에 계실 때 박계동, 정순철 등 광주항쟁 주모자들을 숨겨주고 있다가 안전을 위해 일본 밀항을 주선하였는데, 선장의 밀고로 박계동 등은 피했지만 김신부가 체포되는, 삼천포 사건으로 남영동 대공 분실에 끌려갔던 일이 있었다. 입건되어 재판정에 섰을 때 혹자가 물었다. 신부가 왜 무엇이 불만스러워 여기에 섰는가?
김 신부의 대답은 이랬다. 오죽했으면 신부가 나섰겠는가? 세상에 불의와 부패가 만연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정신 차리지 않고 있는데 신부가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겠는가? 그렇다. 그게 바로 예언자의 목소리다.
세상에 외치고 외쳐서 민중을 일깨워야 하는 것이 예언자의 시대적 사명이다. 그래서 예언자의 길은 외롭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거기에 대해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는 고백을 김 신부가 죽기 얼마 전에 한 적이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어두운 면이 많다. 김 신부는 떠나고 남아있는 우리 무지렁이 같은 사람들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어두움을 밝히는 목소리를 멈추지 않도록 다시 한번 이 자리에서 다짐해 본다.
2021. 10. 19(화) 경남 고성 이화공원 성직자묘역에서 허성학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