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민의 먹고싸는 이야기] 국수와 함께하는 음식 이야기⑤

진주냉면은 접대와 유흥을 위한 별식이었다.

2021-06-11     황규민 약사

1980년대 초반 중고등학교를 진주에서 다닌 나는 메밀국수 냉면에 대한 기억이 없다. 물론 외식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짜장면에 대한 기억은 있다. 메밀국수에 대한 기억은 온면이거나 냉면이거나 집에서거나 식당에서거나 전무하다. 물론 개인적 기억이다.

진주 지역은 바다와 가깝고 지리산과 접해있어서 물산이 풍부했다. <택리지>에 따르면, 땅이 기름져 소출량이 다른 지역의 2-3배였다고 한다. 논농사 중심이기 때문에 밭에서 자라는 메밀과 감자 등은 쌀이 떨어졌을 때 어쩔 수 없이 먹는 구황 식재료였다. 흔한 재료도 아니고 당시로는 만들기 까다로웠던 국수는 서민이 자주 즐기던 음식이 아니었다. 만들기 어렵고 고명 등이 화려한 '진주냉면'은 유흥 시 야참으로, 술 먹은 후의 해장 음식으로 발달했다. 조선시대 관조직 교방이나 일제시대 기생조합 권번에서는 여럿이 준비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반면 평양, 함흥 등은 논농사 쌀농사가 쉽지 않은 척박한 환경이어서 메밀과 감자 등이 거의 주식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므로 메밀국수와 감자전분 국수는 북쪽에서 소박한 서민대중 음식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물론 교방과 권번에서는 고급화하여 유흥별식으로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이후 냉장기술의 발달과 함께 외식 메뉴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쇠고기, 해산물 등 화려한 식재료를 기본으로 하는 유흥접대음식으로 발달한 '진주냉면'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중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소멸해 갈 수밖에 없었다.

황규민 약사

냉면으로 유명한 평양, 함흥, 진주 세 곳은 모두 기생 문화로 유명하다. 평양과 진주의 기생문화는 익히 알려진 대로이지만 함흥의 기생문화도 보통이 아니었다. 시인 백석의 연인이 함흥 기생 김자야였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사실이다. 기생문화는 평양 함흥 진주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냉면의 시작, 유래까지는 아니더라도 냉면이 발전하고 명성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냉면이 기생문화와 함께하는 밤참으로, 해장음식으로 사랑받았다는 것이다. 한겨울에 냉면이 웬 말인가 하겠지만 밤늦게까지 놀다 먹는 '야참'이라 하면 이해가 간다. 그리고 술 마신 후 시원한 해장으로서의 냉면이라면 주당에게는 느낌이 확 와 닿을 것이다. 한 끼도 힘든 서민들에게 메밀이거나 밀이거나 재료도 귀하고 만들기도 만만치 않은 냉면이 웬 말이냐 하겠지만 접대와 유흥을 위한 관조직인 교방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한량들이 드나들었던 권번에서도 역시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고려시대부터 냉면이 있었다고 하니 기생문화와 냉면의 '유래', 발전과의 관계에 기생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믿거나 말거나지만) 충분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진주냉면은 진주에서 유래한 냉면이기보다는 진주에서 진화 발전한 냉면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조리법이 정확하게 전해지지는 않으나 쇠고기, 해산물로 육수를 내고 육전 등 푸짐한 고명을 얹는다는 특징이 있다라는 냉면에 대한 언급에서 바다가 가깝고 우시장이 있었던 지역적 특성이 냉면문화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진주냉면이 교방을 벗어나 일반인들을 만나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후반인 듯하다. 당시 교방 숙수 한 사람이 교방을 나와 옥봉동에서 개인 장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1910년 나라가 망하고 교방청이 해체되자 기생들은 권번과 요정 또는 유곽으로 나와 활동했다. 왜인, 지주 등 돈 많은 한량들은 늦게까지 기생놀이를 하고 냉면집에 들러 밤참을 먹었다고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선주후면'의 전통이 있어 술을 마신 후에는 반드시 냉면으로 마무리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주냉면은 조선의 멸망, 일제강점기, 6.25를 거치면서 기존의 양반, 권력층 등 핵심 소비자가 사라지고 진주 교방청의 해체, 진주 권번(‘진주기생조합’, 주식회사 진주 예기권번')의 해체로 공급자가 사라지면서 쇠퇴의 길에 접어든다. 1960년대 들어서면 진주냉면은 갑자기 맥이 끊긴다. 밀가루가 귀해서 어쩔 수 없이 메밀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던 것이 냉면의 시작인데 1960년대 이후 밀가루가 대량 공급되면서 경쟁력을 잃은 것이다. 변화와 혁신의 노력이 필요했으나 태생이 그런 것과는 다른, 그리고 그럴 필요가 없었던 진주 양반들의 접대음식, 한량들의 유흥음식으로 발달한 '진주냉면'은 시대의 흐름에 밀려나게 된 것이다.

* 사실상의 오류, 관점상의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의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