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남 진주시 하대동

“아이고, 우리 동네는 별 기 없는데 우짜노…. 하대동은 딴 데보다 동네가 맹글어진 게 얼마 안 돼가지고 이야기 거리가 없다니께.”

하대동이 어떤 동네냐고 물으면 주민들은 금방 난색을 표한다. 역사가 짧아 ‘내세울만한 게’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날 잡아서 하대동 구석구석을 다니기 전까지는 말이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진주시 도심이 뻗어나가면서 개발과 함께 주거지역으로 확장된 곳이 하대동이었다.

 

▲ 1980년대 초반까지 허허벌판이던 곳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언제부터 하대동이라 했을까

“하대동 쪽은 의령 합천 지역에서 진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었습니다. 70년대 초반까지 자식들 교육이나 먹고 살 길을 찾아 이곳에서 농사를 짓거나 행상을 시작하고, 또 공단이 들어서면서 노동자로 일하게 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요.”

40년 이상 하대동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1960년대~1970년대 이촌향도 현상에 따라 하대동이 제법 마을로 형성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산업화로 인해 진주에서 대동기업 등 제조업체가 생길 때 진주 인근지역 주민들이 몰려와 자리를 잡았다.

하대동은 선학산과 남강 하류로 빠지는 넓은 둔치를 가지고 있다. 선학산은 중앙시장 등 진주 원도심과 도동의 신시가지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선학산 정상에서는 원도심인 칠암동과 진주교, 진주성을 한눈에 볼 수 있고 다시 몸을 돌리면 병풍을 두른 듯 펼쳐지는 상대동과 하대동을 바라볼 수 있다.

“선학산은 경치도 좋고 접근성이 좋아 도동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곳이지요. 도심 한가운데 이리 쉽게 갈 수 있는 산이 있다는 건 주민들 복이지요.”

도동. 진주 사람들은 뒤벼리 뒤쪽 동네 혹은 진양교 건너 동네를 통칭해서 ‘도동’이라 했다. 물론 이는 진주 원도심(지금의 중앙동) 기준으로 그랬다.

여지도서에 따르면 부터 고려부터 조선 전기까지는 진주 목(晉州牧)의 동면(東面)이라 했다. 진주의 동쪽에 있는 면이라 뜻이겠다. 이후 도동면이라 불리었는데, 진주가 도청소재지였던 점을 감안하면 도청의 동쪽이라 뜻으로도 짐작이 된다. 도동면은 1938년 지방행정구역 사용치 않게 됐다.

지금의 하대동은 1949년 정부 수립으로 진주시가 38개동으로 개편할 때 상대동에 속해 있다가 1992년에야 분리된 것이다. 하대동이라는 지명은 이때 생긴 것으로 이제 20년이 조금 넘은 지명이다. 하지만 조선 말에는 하평촌,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하대리 등으로 불리었던 것으로 보아 ‘하대동’ 지명에는 옛 지명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대동은 다시 1997년 하대1동과 하대2동으로 나뉘어졌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하대 1동과 2동 거주 인구는 3만 명 정도. 진주 인구의 9%가 넘는다. 주거 밀집 현상이 빚어지면서 상권이 급격히 발달했다.

#1970년대 150원하던 우동 한 그릇 값이면 땅 한 평

“하대 35종점에서 탑마트 사거리까지 그 일대를 둘러보면 별의별 게 다 있어요. 요즘은 상권이 주거지역과 따로 분리되지 않는 특징이 있는데 하대동도 아파트 밀집지역에 식당, 주점 등이 많이 들어서 있지요. 참말로 마이 좋아졌지예. 옛날에 똥값이던 논밭 땅들이 인자는 금싸라기 땅이 됐심니더.”

하대동은 30년 전만 해도 진주 시내에서 보자면 가장 외곽이었다. 시내에 사는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 올똥말똥한 동네였다는 것이다. 이곳은 40년 전만 해도 모래땅에다 허허벌판 논밭이었다.

▲ 남강 침수 피해가 잦던 이곳에는 둑을 높이고 주민들이 이용하는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로 조성됐다.

“지금이야 상권이 발달한 동네지만 40년 전만 해도 이 동네 사람들이야 농사 짓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땅 한 평이 우동 한 그릇 값이었으니께.”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상평동에 공단이 들어서면서 더러 공단 노동자가 되었다. 공단이 형성된 후 인구는 대폭 증가했고 하대주공아파트 등 공동주택단지가 차례로 들어섰고 상권이 빠르게 형성됐다. 1990년대 이후 하대동은 가히 ‘상전벽해’라 할 만했다.

하대동 강변쪽으로 따라가다보면 초창기 자리 잡은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폴리텍대학(옛 직업훈련원)과 프란치스코요양원, 한센부설병원 등이 있고 하대동의 대단위 공동주택인 현대아파트가 있다. 현대아파트는 예전 진주실업전문대학(진주실전) 터였다. 진주실전은 1970년대 후반 진주여자실업대학으로 설립해 곧 진주실업전문대학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이후 문산으로 옮겨 4년째 대학인 진주국제대학으로 승격됐다.

#민주화 움직임과 같이 했던 하대성당

하대동에서 빼놓지 않고 이야기 할 곳은 ‘마산교구 하대동 성당’이다. 이곳은 1986년 설립됐다. 하대동에 인구 밀집이 이뤄지던 초창기다. 그후 하대성당은 하대동 주민들의 삶과 같이 해왔다. 특히나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시기 이곳은 지역과 함께 해왔다.

▲ 하대성당. 1990년 진주지역 민주화운동의 구심 역할을 했다.

“굉장했지요. 허철수, 김영식, 박창균 주임신부가 생각나네요. 농민, 노동자가 많은 지역이라 그런지 지역 사안은 물론이고 민주화 운동에 항상 앞장섰으니까요.”

당시엔 그만큼 도동지역에서 하대성당이 주민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대성당은 지금도 주민 속에서 함께하고 있다. 종교의 역할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준다.

하대성당에서 다시 강변 현대아파트 앞으로 가면 알록달록한 건물이 눈에 띈다.

“정식 명칭은 육아종합지원센터인데 주민들은 장난감 도서관이라고 합니다.”

‘장난감 도서관’은 진주시가 49억 3천만 원을 들여 건립하는 것으로 보육 서비스 제공이 목적이다.

▲ 진주시 육아종합지원센터. 하대동에 있으며 '은하수센터'로 불린다.

“하대동 인구 연령대를 보면 젊은 층 비율이 비교적 높은 편이라 꼭 필요한 시설입니다. 센터에는 장난감은행, 보육도서관, 체험놀이방, 일시 보육실, 육아방, 맘 카페, 옥상 하늘정원 등 수요자 중심의 다양한 공간이 있어 주민들 이용률이 높습니다.”

진주시는 센터 운영을 위해 연간 6억 8천만 원의 운영비를 투입하고, 전문가와 학부모 대표 등으로 구성된 센터 운영위원회를 발족해 센터 운영을 효율적으로 해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하대동 끝자락인 남강둑. 현재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를 닦아놓은 이곳에 올라서면 하대동이 얼마나 ‘복 받은 동네’인지 알 수 있다. 둔치와 습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강에서 부는 바람은 골을 따라 동네로 움직인다. 40년 전만해도 소외됐던 모래땅에는 지금도 기적과도 같은 삶들이 있다.

#하대동 속 숨은 진주 숨은 이야기

하대본동 경로당에 가면 입구에 큰 비석이 있다. 2010년에 주민들이 세운 ‘만대할머니 유적비’다.

“어릴 때부터 만대할머니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어른들도 잘 모르데예. 이 경로당하고 중앙고등학교 뒤쪽 땅이 만대할머니가 주신 땅이라예."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일가친척도 자식도 없었던 할머니는 생존시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선행을 베풀었고 돌아가실 때는 현재 하대본동 경로당 터와 중앙고등학교 뒤쪽 농지 400평을 하대동 주민들을 위해 내놓았다고 한다.

“현 시가로 치면 20억 원 정도 됩니더. 매년 재산 지내고 재산세 내고 원금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만 이 동네 주민들을 위해 쓰고 있지예. 만대할머니가 평생 동안 아끼고 모은 재산이 대물림 되면서 우리 동네 자손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 더 큰 일이지예.”

본동경로당에서 만난 박방조(73) 아재는 만대 할머니는 언제 생존했는지, 존함마저도 분명치 않다고 말했다. 언제부터인지 ‘자손만대’에서 따온 만대를 붙여 ‘만대할머니’라 부르게 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경로당 건물은 진종석 도의원 무렵 지은 건데 우리가 세를 도에다 내고 있지예. 만대할머니가 기부한 자산을 관리하는 재산위원회가 있는데 전체 회원이 109명이라예. 하대본동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회원 제명이 됩니더.”

지금도 주민들은 매년 음력 5월 7일이면 본동경로당에서 만대할머니 제를 지내고 뜻을 추모하고 있다.

“유적비 세운 장소가 좀 협소하지예. 옆터에다 만들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된 기라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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