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보다 마르크스란 농담 아닌 농담이 있다"

마스크가 일상이 된 시대다. 코로나19라는 전염성 강한 역병이 창궐하면서 한때 마스크 대란이라 불리는 사태까지 연출되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태가 진정되고 나자, 마스크는 이제 기능성을 넘어 하나의 패션 아이템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요즘 거리를 나가보면 모양도 색깔도 다양한 마스크들이 자주 눈에 띈다. 기왕 쓰는 거 예쁜 것을 찾게 마련. 제조자들은 이런 추세를 반영, 아이들이 좋아하는 자동차 무늬 마스크부터 연예인 마스크라 불리는 색깔 마스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출시해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 마스크의 용도가 확장된 것이다. 이런 마스크 용도의 진짜 극적인 확장은 이전에 이미 한번 있었다.

예전 치열했던 민주화시절 이야기다. 시민들이 마스크를 보건 쪽 외에 주로 사용한 곳이 바로 집회, 시위 현장이었다. 민주화의 마스크랄까? 파업현장, 학생시위 등 시위 현장엔 늘 마스크가 함께 했다. 특히 화염병, 짱돌,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한 대오에겐 필수품이었다. 최루탄이 난무하던 시절이기도 했거니와 경찰의 사진 채증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최루탄이 없어지고 나서는 주로 사진 채증을 피하는 용도로 쓰였다. 이 마스크도 여러 층으로 된 구조의 KF등급 마스크처럼 여러 제반 요구들을 가진 각계각층이 한데 모여서인지 비말이 아닌 비민주를 나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그렇게 힘들게 지킨 민주주의 속에서 오늘 우리는 안녕한가? 안타깝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증거가 넘친다. 소위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오늘날에도 노동자 대여섯이 매일 일터에서 죽는다. 나라 안으로만 보자면 코로나로 인한 일일 사망자 수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다. 자살률은 또 어떤가. 더해 가계부채는 십 수 년째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나 좋아라고 하는 OECD내 자살률과 가계부채율 1위의, 위엄 아닌 위험의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지점은 이런 지표들이 죄다 서민경제와 관련된 지표들이란 점이다.

▲ 박훈호 자유기고가

경제적 불평등은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심각한 문제임과 동시에 당장 어느 정도 개선이 가능한 범위 내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마스크의 기능을 생각한다. 코로나19는 물론 무서운 질병이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경제적 민주화의 부족으로 인해 한국사회에 만연한 사회적 병리현상보다는 파괴력이 현저하게 약하다. 파괴력 약하고 잡기는 힘든 코로나에는 당장의 인적, 물적, 사회적 자산을 총동원해 국민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정부가, 바로 개선할 수 있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코로나보다 더 심각하게 위협하는 사회구조적 문제는 방치하고 있는 꼴이지 않나. 이는 기만이고 위선이다. 그러니 불온하게도 마스크의 다른 기능을 생각할 밖에.

이런 문제는 외면한 채 코로나에 국가적 재원도, 우리의 관심도 ‘올인’하는 것은 우리의 안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을이 다가오면서 코로나가 다시금 대유행할 거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우울한 관측이다. 개인위생, 타인을 위한 배려, 멈추지 말아야 한다. 같은 맥락으로 정치의 영역에서 풀 수 있는 사회문제에 대한 제안, 충고, 비판 또한 멈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투쟁까지도. 가뜩이나 코로나사태로 더 어려워진 경제가 누구의 목부터 조일 것인가는 분명하다.

코로나는 자연에서 온 것이다. 완전 차단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반면 경제적 불평등은 인간 사회에서 나타난 것이다. 사회구조가 초래한 사회적인 병리현상이다. 더해 현실적이고 다급하며 당장 중증에 통할 처방이 얼마든지 있는 문제다. 당장 개선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코로나19 백신의 제조보다 전태일 3법의 제정이 더 빨리되길 원하고 요구한다.

오늘날처럼 사회 양극화가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소위 마스크보다 마르크스란 농담 아닌 농담이 있다. 최소한 질병엔 눈이 없지만 이런 불공정한 경제를 운용한 우리에겐 눈이라도 있지 않은가. 권력이 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금 마스크를 예전의 용도로 사용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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