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 정신대로 일본에 간 뒤 납치돼 피해.. 임종 전까지 ‘위안부’ 문제 해결 힘써

▲ 영화 '기억과 함께 산다' 스틸컷. 고 강덕경 할머니

[단디뉴스=김순종 기자] “우리 같은 인생을 또 겪어서는 안 된다. 일본에게 사죄 배상 등 받아낼 건 다 받아야 한다. 아직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한국의 수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사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고 강덕경 할머니(1929~1997)는 생전,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증언하며 이 말로 끝을 맺었다. 할머니는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성노예 피해를 입은 뒤 더 이상 고향에 살지 못 했다.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이다. 이날은 고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14일 일본군으로부터 받은 성노예 피해 사실을 증언한 날에 맞춰 제정됐다. 2012년 대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아시아 연대회의에서다. 올해 기림일을 맞아 지역에서도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 그 와중에 진주 출신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강덕경 할머니의 삶을 되짚어 본다. 증언집 등 자료에 기초해서다.

강덕경 할머니는 1929년 진주 수정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는 재혼을 해 거의 외가에서 자랐다. 외가는 형편이 괜찮았다. 할머니는 중안초등학교(당시 요시노 소학교)를 다녔다. 31회 졸업생이다. 졸업 후 같은 학교 고등과 1학년을 다니다 같은 반 친구 한명과 1944년 여자근로정신대 1기생으로 일본에 갔다. 일본인 담임이 가정방문을 와 정신대로 나가라고 제안한 걸 받아들여서다. 당시 나이 16세.

당시 진주에서 모인 여자근로대는 50명, 부산으로 가는 길에 마산에서 50명이 합류했다. 부산에서 모인 50명까지 모두 150명이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 도착한 뒤 할머니는 도야마 현 후지코시 비행기 공장에서 일했다. 하루 근무시간은 열두 시간, 낮과 밤 근무를 일주일씩 교대로 일했다.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진주에서 간 사람들은 모두 선반으로 비행기 부품 깎는 일을 했다고 한다.

월급은 당장 지급되지 않았고, 일은 고됐다. 월급을 저금해 준다는 말이 있었지만, 한 번도 월급이 든 통장을 본 적은 없다. 배도 늘 고팠다. 밥과 된장국, 단무지가 고작이고 밥도 아주 조금밖에 주지 않았다. 밥은 세 숟가락에 다 먹어치울 수 있을 정도였다. 점심으로는 조그만 콩떡 세 개를 줬고, 밤 근무를 할 때는 아침식사 외에는 지급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기숙사는 공장 안에 있었다. 방은 다다미 열두 장 크기. 열두 명 정도가 한 방에 지냈다. 일본인은 없었고, 조선인들만 있었다. 진주 마산, 전라도 등 같은 고향 출신끼리 방을 썼다. 고된 생활에 같은 방 대원들은 일본군가에 가사를 붙여 일본말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사는 “아아 산 넘고 바다 건너 멀리 천리길을 정신대로.. 아득히 떠 있는 반도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 '기억과 함께 산다' 스틸컷. 고 강덕경 할머니

공장에 온 지 두 달이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인근 마을 조선인 집으로 친구와 함께 도망쳤다. 곧 붙잡혀 뺨을 맞고 크게 혼났다. 하지만 거듭 도망칠 궁리를 했고, 또 다시 도망치다 군인에게 붙잡혀 성노예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도망 중 ‘고바야시 다데오’라는 일본 헌병이 할머니를 붙잡았고, 부대로 이동 중 야산에서 할머니를 겁탈했다. 당시의 기억을 담아 할머니가 생전에 그린 그림이 ‘빼앗긴 순정’이다.

일본 헌병은 이후 할머니를 부대에 데리고 가 천막 같은 집에 머물게 한다. 이곳에는 다섯 명 정도의 여성이 머물고 있었다. 천막 집은 천으로 된 칸막이로 대여섯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 칸에는 군용 간이침대가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에 그 곳이 무얼 하는 곳인지 몰랐지만, 사흘 뒤부터 진상을 알게 됐다. 하루에 10여명의 일본군을 받아냈다. 특히 토요일에 많은 군인들이 찾아와 토요일이 오는 게 죽을 만큼 싫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절망적이었다. 할머니는 매일이 무서웠고, 음부가 아파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할머니를 ‘하루에’라고 부르던 일본군은 깜깜한 야산에 할머니를 끌고 가 몇 사람인지도 모를 남자와 관계를 갖게도 했다. 할머니가 고통을 호소하며 걷지 못할 때면 군인들은 할머니를 끌다시피 해 천막으로 데려오기도 했다. 할머니는 증언집에서 “그 때의 비참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군인들에 의해 부대를 이동했다. 그 곳에는 먼저 온 20여 명의 여성이 있었다. 부대 규모는 이전보다 컸지만 군인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루 대여섯 명을 상대해야 했다. 머물던 곳 안쪽에는 큰 방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작은 방들이 있었다.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큰 방에 머물다가 군인들이 부르면 작은 방에 가 그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하루는 부대이동을 함께한 일본 헌병 ‘고바야시 다데오’ 앞에서 공장에 근무할 때 자주 부르던 군가에 새로운 가사를 붙여 불렀다. “아아 산 넘어 산을 넘어 멀리 만 리를 정신대로, 상등병에게 잡혀 내 몸은 찢겨졌다” 고바야시는 할머니의 입을 틀어막고, 한동안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할머니는 그 와중에도 도망갈 생각뿐이었지만, 할머니가 머물던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기억과 함께 산다' 스틸컷. 고 강덕경 할머니(오른쪽)

어느 날 너무 조용한 분위기에 부대를 둘러보니 보초는 없고, 군인들은 모두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길에 나서니 만세소리가 났다. 조선인이었다. 징용 온 사람 같았다. 아저씨에게 부탁해 부대를 빠져 나왔다. 오사카를 거쳐 일본 군인에게 붙잡히기 전 근무하던 공장(신미나토) 근처에 이르렀고, 공장에서 처음 도망 나왔을 때 잠시 숨어있던 방 씨 아저씨(조선인) 집에 갔다. 그간의 사연을 말하고 아저씨와 함께 한국에 가기로 했다. 방 씨를 좋아한 일본인 아주머니도 함께였다.

일본인 아주머니는 할머니가 임신한 사실을 할머니보다 먼저 알았다. 할머니가 일본 군인에게 납치됐던 때는 초경이 있기 전이었다. 부대에 있을 때 피가 살짝 비친 적이 있는데 그쯤 임신이 된 것 같았다. 현해탄을 건너 국내로 돌아오며 여러 번 빠져 죽으려 했지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 챈 일본인 아주머니가 옆을 따라 다니며 할머니를 지켰다. 할머니는 그렇게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내로 돌아와 방 씨 아저씨와 남원으로 갔다. 일본에서 온 귀향민 숙소, 국수여관에 머물렀다. 1946년 1월 아이를 낳았다. 일본인 아주머니가 아이를 받아줬다. 진주 집으로 돌아갔지만, 그 곳에서 살 수 없었다. 할머니의 어머니는 아기가 딸린 꼴로는 집에 오지 못한다며 부산에 살도록 했다.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부산진의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고 평화식당에서 일했다.

일요일이면 고아원으로 아이를 만나러 갔다. 고아원에서는 아이가 죽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믿을 수 없었다. 아이의 죽음 후 강 할머니는 술에 의지하는 나날을 이어갔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위안소’에서의 경험으로 남자들이 싫어졌고, 할머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저 거부했다. 각종 질병에도 시달렸다. 특히 자궁에 문제가 생겨 하혈하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위안부’ 시절을 떠올리며 한스러워했다.

할머니는 일생동안 식당일, 장사, 남의 집일, 농사일 등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삶은 외로웠다. 그러던 1991년 경기도 남양주 비닐하우스에 거주하던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성노예 피해사실을 폭로하는 모습, 일본 정부가 이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연락해 피해사실을 증언하고, 1992년 말 나눔의 집에 입주한 뒤 일본군 성노예 문제 해결에 힘썼다. 유엔인권이사회, 일본의회 등을 방문해 피해사실을 증언했다.

 

▲ 고 강덕경 할머니가 그린 '빼앗긴 순정' [사진=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누리집 갈무리]

수요집회에도 충실했다. 1995년 12월 폐암말기 판정을 받았지만, 몸이 아픈 와중에도 수요집회에 참여했다.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진심어린 사과를 받기 위해서다. 미술 교육프로그램을 받으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위안부’ 화가라는 별칭도 얻었다. <빼앗긴 순정>, <책임자를 처벌하라> 등 할머니가 그린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할머니는 폐암으로 1997년 2월 별세했다. 묘소는 경남 산청군에 있다.

강덕경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여러 영화에 담겼다. 1997년 8월 개봉한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2’, 일본 저널리스트 도이 토시쿠니가 2015년 발표한 ‘기억과 함께 산다’ 등이다. 남은 영상에 따르면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일본의 사죄 배상을 받기 위해 싸우고자 했다. 임종 직전까지 여권을 손에 붙잡고 일본에 항의하러 가려는 의지를 보였다. 할머니는 생전 "꼭 우리의 존재를 알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계속 싸워야 한다"고 버릇처럼 말했다.

한편 진주평화기림사업회는 고 강덕경 할머니를 비롯해 진주가 고향이거나 진주에 살았거나 혹은 진주를 거쳐 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수가 19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고 김순이, 강도아 할머니는 진주에서 '위안부' 피해신고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8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은 14일까지 정부에 등록된 243명의 성노예 피해자 가운데 생존해 있는 사람은 17명이다.

* 이 기사는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 위안부들 - 증언집 1', 영화 '낮은 목소리', NORTHEAST ASIAN HISTORY NETWORK 누리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e-역사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누리집 등에 오른 각종 자료에 기초해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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