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농업, 돈 보다 사람

신기하게도 이른바 보수정권이나 진보정권이나 차이가 거의 없는 정책분야가 있다. 바로 농업정책이다. 지난 60년 이상 보수든, 진보든 농정당국에서 일관되게 내거는 농정의 핵심 과제는 기업화 규모화 산업화이다. 농업선진화, 6차산업 또는 융복합농업, 스마트농업, 수출농업 등 현란하지만 공허한 농정구호의 깃발만 드높다. 아사, 소멸 직전인 전국 농촌의 빈 들판마다 을씨년스럽게, 요란하게 깃발만 나부끼고 있다.

▲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

물론 정부 나름대로 내세우는 명분이나 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국제 자유무역시대에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려면 대농, 기업농 중심으로 헤쳐모이는 규모화, 산업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생산비 절감으로 가격 경쟁의 열위나마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얼핏 그럴싸해 보이지만 진실로 들리지는 않는다. 부디 농정당국자들에게 바라건대, 농정부처의 청사나 관련 대학과 연구원의 연구실에만 앉아 있지 말라. 외국 수입산 농업경제학 교과서에 나열된 박제화된 교조적 관념과 이론의 미신에서 벗어나라. 헛된 조사분석이나 삿된 연구개발 등 ‘업무성과를 위한 일, 월급을 위한 일’에만 매몰되지 말라.

당장 농업 농촌현장에 한번 나가보라. 가서 ‘돈 버는 농업’이라는 농업경제학만이 아닌 ‘사람 사는 농촌’이라는 농촌사회학의 시각으로, 농촌의 빈 들판을 한 번 살펴보라. 주의 깊게 애정을 가지고, 진심을 다 해서, 머리로 말고 가슴으로도. 불행히도 그토록 글로벌한 차원까지 고려한 고도의 정책 수혜를 받을만한 대농, 부농, 기업농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한국 농정의 진실이다. 엄혹한 한국 농정의 현장이다.

한국 농민의 평균 농지보유 면적은 1.5ha에 불과하다. 그나마 1ha 미만인 농가는 전체 농가의 65%가 넘는다. 농업소득(농축산물 판매금액)이 1000만원도 안 되는 농가 역시 65%, 72만 가구에 달한다. ‘돈 버는 농업’의 성공지표로 연간 1억 원 이상의 농업소득을 올리는 이른바 억대농부는 2.7%, 3만 가구에 불과하다. 3ha 이상의 농사를 짓는 농가조차 10만 가구 정도로 열 농가 중 한 농가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한국 농업을 이끄는 농민의 표본은 1.5ha의 작은 농지에서 연간 1000만원 밖에 못 버는 소농, 영세농 처지에 불과한 65세 이상의 노인일 뿐이다. 이게 한국 농업의 참담한 현재이고 미래이다.

 

‘돈 버는 농업’ 아닌 ‘사람 사는 농촌’

이제 다른 방법이 없다. 한국의 농촌을 단순한 생산 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으로 바라보는 인식 대전환이 필요하다. 농민을 단순한 경제활동 인구로서보다 사회복지의 수혜 대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자면 농정의 패러다임이 전업농 육성 위주 ‘돈 버는 농업’으로의 상업화 규모화 패러다임이 아니라, 가족․중소농 중심의 ‘사람 사는 농촌’ 중심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한국 대부분의 중소농들은 가족 노동력에 기대 자급자족해야하는 가족농 처지이다. 열에 아홉이 넘을 것이다. 상업화, 규모화와는 거리가 먼 생계형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다. 수익성이나 고부가가치는 고사하고 수지타산을 맞추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중소․가족농 중심’의 농업정책은 소득 중심 농업경제학의 시각으로 접근하면 위험하다. 농민 기본소득 등 기초생활 보장제, 직불제 등 농가 소득 보전, 보건 주거 등 사회안전망, 영농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를 중심으로 사회 복지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안전하다.

무엇보다 농민들이 현장에서 요구하는 농업의 대안은 기업농 중심, 자본투자 위주 모델이 아니다. 그보다는 중소농 중심 협동조합 방식의 '협동화사업' 모델이 바람직하다. 6차산업화든, 스마트농업이든 소규모, 영세 농업경영체가 많은 우리 농촌의 공동체 특성과 다기능성을 살리면서 추진되어야 마땅하다. 농정 당국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농기업 창업, 일자리 창출, 농가소득 제고 등은 그 협동화사업의 선순환 구조 속에서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특히 협동조합은 지역사회의 사회적 자본(Socail capital)을 증진시킨다. 지역사회 주민들이 협동조합에 참여하면서 협동조합의 발전과정, 조합원 역할, 리더십 등을 경험하고 공유하면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또 과소화되고 사회적 활력이 저하된 농촌지역에서는 사회적 연결망이 침식되거나 부재한 상태이다. 따라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거나 복원하는 조직화 활동이 절실하다.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방법, 협동조합을 통한 ‘협동사업화’가 최적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이유다.

다만 농촌지역 협동조합의 정상화, 활성화를 위해서는 관련 제도와 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농어업경영체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부터 개정할 필요가 있다. 법인세 및 부가가치세 면제 등의 지원대상인 농업회사법인은 상법상 법인 형태로만 설립이 가능하다(조세특례제한법 제68조, 제105조, 제106조). 따라서 농업법인(영농조합법인 및 농업회사법인)과 동일한 수준의 지원이 가능하도록 협동조합을 농업법인의 한 형태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농업인들의 협업적 농업경영체 성격의 협동조합을 설립할 경우, 이 법률의 지원대상에 포함시키는 게 형평성에도 부합한다는 판단이다.

 

‘6차산업 가족농’으로 지역순환농업을

오늘날 한국 농업현장에는 6차산업화의 깃발이 펄럭인다. 하지만 현장에 농민은 없고 자본과 기업만 우뚝하거나 농업은 잘 안 보이고 공업과 서비스업만 무성한 사례가 적지 않다. 실제로 1차 농산물 재배는 없고 2차 농식품 제조와 3차 농촌관광과 유통 서비스만 영위하는 사례도 눈에 자주 띈다. 0곱하기 2곱하기 3을 하니 도로 0차 산업의 공허한 모양새가 되는 셈이다.

6차산업 정책이 추구하는 지역 내 연대(시너지) 효과도 한계가 있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6차산업화는 통합적 관점보다는 개별 경영체·마을단위로 진행되는 게 특징이다. 지역 내 주체들 간의 연대를 통한 시너지 효과 창출에 구조적으로,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또 실제 현장에서는 농산물, 식품, 체험·관광 위주로 사업이 진행되면서 지역의 문화, 역사, 음식 자원의 활용 및 서비스 산업화라는 융복합적 정책의 목표지점과도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울러 무엇보다 농민들이 현장에서 요구하는 ‘6차산업화’의 대안은 중소농 중심 ‘협동화사업’ 모델이 적정하다. 6차산업화 정책은 농촌의 공동체 특성과 다기능성을 살리면서 추진되어야 마땅하다. 6차산업은 본질적으로 1차 농업 생산이 근간이기 때문이다. 이때 고용창출이라는 정량적, 직접적 목표보다는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정신, 지속가능한 자원순환시스템 등을 통한 농촌 소득증대의 선순환구조를 염두에 두어야 함을 물론이다.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의 선진농업국에서는 기업농과 가족농의 구분이나 대립이 없다고 한다. 거의 모든 농가가 가족농이기 때문이다.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켐텐(Kempten)시 알고이(Allgäu)지역의 니더탄너 가족농은 전형적인 유럽식 가족농이라 할 수 있다. 라이자흐 유기농 과수원(reisach früchtegarten)에서 20대 중반의 외아들 마틴(martin)은 3년제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과수 마이스터 과정을 이수하면서 ‘승계농’의 길을 가고 있다.

네 명의 딸도 농장 일을 직간접적으로 거들고 있다. 10살이 채 안돼 보이는 어린 막내딸까지 양계장, 직판장에서 한 일꾼 몫은 거뜬히 맡아할 정도다. 농부 현업에서 사실상 은퇴한 니더탄너 씨의 아버지도 여전히 농장을 지키고 있다. 일종의 고문 역할이다. 이로써 어엿한 3대 가족 승계농의 지속가능하고 예측가능한 영농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농업의 살 길, 그리고 식량주권 최후의 보루는 가족농이라 할 수 있다. 정글 같은 세계자유무역협정 시대에 미국, 호주 등의 글로벌 메이저 농기업과 겨루자며 농지 집단화, 수출기업화 등 규모의 경제에 매달리는 건 허황되고 무모한 과대망상증이다. 소규모 가족농들은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고 있는 공익요원이다. 지역 전통 특화자원 기반의 친환경 6차 융복합형 지역순환농업으로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국가와 사회가 직접 농민의 농업을 보살피고 챙긴다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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