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행정, 갑질 말고 섬김

"현재 농민은 전체 인구의 4% 정도인데 계속 줄고 있어요. 그런데 농림축산식품부는 갈수록 비대해지고 있습니다. 산하 공공기관도 자꾸 생기고 있고 직원들도 증원되고 있어요. 농민이 줄어드는데 왜 농민을 지원하는 부처와 기관들은 늘어나야 하나요. 줄어야 정상 아닌가요? 솔직히 없어도 될 공사와 공직자가 너무 많아요. 이런데 들어가는 경상비를 농업 농촌 농민을 위한 데 쓰면 됩니다“

김성훈 前 농림부 장관의 주장이다. 불필요한 농정 공무원부터 정리해야 농정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통찰이자 혜안이다.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한다. 심지어 그는 농정 공무원을 이른바 ‘농업의 5적’으로까지 부른다.

그는 "어영부영 무책임한 농업 관련 공직자, 농업을 효율로만 보는 애꾸눈 경제학자, 손에 흙 하나 묻히지 않은 얼치기 농업경제학자, 표만 계산하는 정치권, 무조건 투쟁만 일삼는 농민단체들, 우리 농업 농촌 농민이 잘 되려면 이들 5적이 대오각성해야 한다“며 ”우리나라 농업·농촌을 망쳐놓은 사람들이 바로 관료집단으로, 관료들은 윗사람 말에 충실해 시키는 대로 할 뿐이고 권력에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데 무슨 변화를 바랄 수 있겠냐”고 개탄하고 비판한다.

▲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

영국의 경제학자 파킨슨(Parkinson, N.)은 관료제 조직의 구성원 수가 증가하는 것은 업무량의 증가와는 관계가 없다며 파킨슨의 법칙을 주창했다. 1935년에 372명이었던 영국 식민지 행정직원의 수는 19년이 지난 뒤에는 1661명으로 늘었다. 이 기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많은 나라가 독립하면서 영국이 관리할 식민지가 크게 줄었는데도 말이다. 농민은 자꾸 소멸되어 가는데 농정 공무원은 무사하고 안녕한 우리 농정의 현실에 이 법칙은 그대로 들어맞는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역시 관료제의 한계점을 ‘쇠우리(Iron Cage)’에 빗대어 경고했다. 사심 없이 공명정대할 것, 직업이 아닌 소명으로서 전문적 역량을 갖출 것, 개인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책임진 역할에 충성할 것 등 본래의 개신교적 윤리라는 색채를 잃어버린 관료제가 껍데기만 남은 채로 굴러가게 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관료제적 조직은 비효율성을 초래하게 되며, 이런 조직들로 굴러가는 현대사회는 곧 시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고 지배하는 ‘쇠우리’로 전락하고 만다는 단언이다.

 

한국 관료의 뿌리는 일제, 미제의 앞잡이, 끄나풀

민족경제학자 박현채의 『한국경제구조론』을 읽어보면 오늘날 한국사회의 불행은‘반민족적 친일파·숭미파 관료체제’의 구조악으로부터 발아됐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영혼 없는 공무원들’이 문제였다. 총독부 근무자 출신의 친일파, 지주나 기업가 출신의 미국, 영국 등 유학파, 그리고 기독교 미션계 학교를 다닌 기독교인 등 이른바 ‘미 군정 관료체제 3인방’이 그들이다.

박현채에 따르면, 해방 전후 일본과 미국, 두 제국주의자들 사이에 식민지 조선이라는 먹잇감을 놓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호호혜적 거래가 성사되었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가 “공산주의자와 선동가들이 해방 후 조선의 평화와 질서를 교란하고 있으니 치안유지 권한을 요구한다”고 청하자 승전국 연합군 최고사령관은 기다렸다는 듯 “미군이 책임을 떠맡을 때까지 38선 이남의 한국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통치기구를 보전할 것”을 지시한다.

결국 조선은 겉으로는 해방됐지만 해방되지 않았다. 일본경찰의 훈련을 받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한국인 85%가 미군정의 경찰로 살아남았다.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도 한국 전체 경찰의 50%는 독립군과 애국지사를 때려잡는 데 앞장 선 일본경찰의 앞잡이들로 채워졌다.

행정부 공무원들도 친일파 일색이었다. 일본인 밑에서 훈련받고 일본에 충성을 다한 친일파 관리들이 새 행정부의 대다수와 상부를 차지했다. 그들 친일파 공무원을 제외한 미 군정의 최고위 간부급은 영어회화능력이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결국 해방 직후 한국은 사실상 미국 군인들이 아니라 이른바 ‘미 군정 관료체제 3인방’ 손아귀에 들어간다. 총독부 근무자 출신의 친일파, 지주, 기업가 출신의 미국, 영국 등 유학파, 그리고 기독교 미션계 학교를 다닌 기독교도들이다.

 

▲ <사진> 오스트리아 슈바츠 농업회의소의 헬무트 트락슬러 소장. 농민들끼리 자치하므로 슈바츠군에는 농정공무원이 필요없다.

공무원 관치 ’쇠우리 없는‘ 빅 소사이어티로

오늘날 한국의 공무원은 ‘신의 직장’ 대접을 받는 한편, ‘영혼이 없는 복지부동형 관피아 철밥통’이라는 조롱을 달고 산다. 전술한 한국의 공무원 사회의 태생적 역사를 살펴보고, 구조적 현실을 들여다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비판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무능하고 부도덕한 공무원은 퇴출시켜 공무원 규모를 대폭 축소해야 하지 않을까. 대신 민간에서, 또는 민관 거버넌스 조직에서 공공의 서비스를 넘겨받아 감당하는 게 더 생산적이고 효율적이지 않을까.

“정부의 지출을 줄이고 공동체사회가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을 바탕으로 한 영국 캐머런 정부의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 전략에 출구가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국가가 직접 개입하는 빅거버먼트(Big Goverment)와는 다르게 민간과 지역사회가 자발적으로 참여를 늘려 사회안전망을 보완”하면 안 되는 걸까.

물론 일각에서는 2000년대 중반에 시작된 캐머런 보수당 정부의 빅 소사이어티가 “정부 지출을 줄이기 위한 명분일 뿐, 정부가 부담해야 할 몫을 공동체에 떠넘기려 한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또 “보수당이 공동체에 활기를 부여한다는 말장난으로 사회복지를 퇴보시키고 재정지출 축소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라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빅 소사이어티'의 중도적 가치는 분명 주목하고 경청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특히 기존의 영국 보수주의(대처주의)와 달리 경제적 성장뿐 아니라 ‘사회정의’를 강조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연세대 홍석민 교수도 “빈곤 감소와 사회정의, 책임화에 초점을 맞춰 정책을 개발하고 신자유주의 시장과 복지국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상호부조에 기초한 보다 평등주의적인 '새로운 시민 국가'가 '빅 소사이어티'의 이상적인 비전"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관점에서 요즘 여와 야, 보수와 진보, 중앙과 지역, 호남과 영남 가릴 것 없이 성행하고 있는 ‘사회적경제’, ‘공유경제’, ‘민관거버넌스’, ‘마을공동체’ 등의 ‘빅 소사이어티’ 지향 정책에 우려보다는 기대를 걸 필요가 있다. 보수적인 영국 보수당과 미국 공화당조차 빅소사이어티, 공유경제 등을 통해 ‘사회적경제’를 정책적으로 수용하고 있기도 하고.

정부나 공무원 일방이 아닌, 민관거버넌스와 풀뿌리 민간자치 그룹이 ‘사회정의’ 구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빅 소사이어티가 이루어져야 ‘공무원 관치’라는 ‘쇠우리’의 구조악에서 초래되는 뿌리 깊은 적폐가 어느 정도 치유되고 제거될 수 있지 않을까. 더도 덜도 말고, 농민이 줄어든 만큼 농정 공무원도 당연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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