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축시럽게 “바다를 봐야겠다”란 생각이 스멀거리면 행장이라고 차릴 것도 없이 나서서 닿는 곳이 대개 남해의 ‘노량’이거나 아니면 삼천포의 ‘실안’ 언저릴 훑곤 했다. ‘새 길’에 대한 갈증이 있었지만 오랜 시간 그 길을 다녔다. 그러다 찾은 길이 고성으로 이르는 해안도로다. 삼천포로 가 남일대 해수욕장을 지나 수력발전소 앞에서 상족암 쪽으로 내닫는 코스가 아기자기했다. 그러나 그건 메인 코스로 들기 전의 행로가 길고 건조한지라 사천 읍내서 정동초등학교를 지나 고성 쪽 내륙으로 내쳐 달리다가 산 하나를 넘는 길을 택했다.

▲ 홍창신 칼럼니스트

그것은 33번 국도를 타고 가다 상리면에서 내려 척번정리를 거쳐 440m 봉암산을 넘어 바다를 만나는 길이다. 상리면에 노란 칠을 한 넉넉한 필지의 주유소가 하나 있어 대개 거기서 기름을 채우고 천천히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어귀의 작은 연못이 유난히 예뻤다. 무논 곁에 나란히 앉은 수수한 ‘못’이다. 지나칠 때마다 거기 멈춰 한동안 바라보다 가곤 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새 삼천포 선창에서 남해 창선을 잇는 긴 다리가 걸쳐지고 용현서 서포를 이어주는 다리도 놓였다. 남해대교를 건설할 때만 해도 동양 최대를 들먹이는 떠들썩한 역사였는데 이제 어지간한 거리의 연륙교를 세우는 것 따위는 일 같잖은 세상이 되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상리의 그 연못을 찾은 것은 작년이었다. 면적이 넓어지고 단장의 흔적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소박함을 잃진 않은 것이 참 반가웠다. 다녀온 후로 그 단아한 풍경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곤 했는데 거기 연꽃이 피었단 풍문이 들리니 설레어 나선 길이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

주변의 부조리와 환경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자라서 아름답게 꽃피우는 사람을

연꽃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을 연꽃의 이제염오(離諸染汚)의 특성을 닮았다고 한다.

 

들머리 빛바랜 입간판에 걸린 ‘이제염오’를 멈춰 읽는다. 설법 중 부처님이 가만히 한 송이 연꽃을 들어 보이는데 영문을 모르는 청중 가운데 ‘가섭’이 홀로 미소 지어 교감한 전설적 설화 이래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 되었다. 깨끗하지 않은 물에서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몸피에 묻히지 않는 정갈함을 칭송받는 지체 높은 품계에 오른 것이다.

지금 상리 연못은 ‘수련’의 시간이다. 수련의 ‘수’가 물 수(水)가 아니라 졸음 수(睡)를 쓴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수련의 꽃은 밤이 되면 봉오리 모양으로 오므라졌다가 낮이 되면 다시 꽃잎을 활짝 편다. 이런 특성 때문에 밤에 잠을 자는 연꽃이라 하여 수련(睡蓮)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는 것이다. 옥편을 보니 그 ‘수’가 ‘꽃봉오리 지는 모양’이란 뜻을 품고 있단다. ‘水蓮’(수련)이 아니라니! 꽃잎과 잎의 모양이 연꽃과 흡사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지만 백련 홍련의 그 연꽃과는 생물학적으론 별 관계가 없는 식물이란다.

들여다보면 잎사귀부터 다르다. 수련과 연꽃은 모두 잎사귀가 둥글고 널찍하게 펼쳐진다. 수련의 잎이 수면에 붙어서 떠 있는 반면 수련 잎보다 큰 연꽃의 잎은 물 위로 껑충 솟아올라 바람에 하늘거린다. 또 물 위에서 늘 젖어있는 수련 잎과 달리 연잎은 탁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바짝 마른 상태다. 특히 투명구슬처럼 송골송골 맺혀서 구르는 연잎 위의 이슬방울은 세속에 살더라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절조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염오’의 헌사를 들을 자는 수련이 아니라 팔월 한창 땡볕에라야 솟아날 백련 홍련의 몫인 것이다.

수련 곁에 서면 감싸듯 밀려오는 ‘안도’는 그래서인가. 시간도 잊은 채 못 둑에 앉았다 빗방울이 들어서야 일어나 동네 한 바퀼 돌아본다. 손바닥만 한 동네 가운데의 앙증맞은 로터리 둘레로 면사무소와 파출소 보건소에다 농협에 교회까지 둘러앉은 척번정리는 기름진 티가 역력한 마을이다. 상리초등학교는 더욱 놀랍다. 들어서면 우람한 전나무와 느티나무가 영접하고 교사 앞에 동그마니 깎아 단장한 꽝꽝 나무를 비롯한 정원수들이 아름답다. 그러나 30분 넘게 서성거렸으나 단 한 명의 사람도 볼수 없었다. ‘염오’를 피하려 숨기라도 하셨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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