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대통령, 집권 말고 통치

“친일파, 독재자의 딸이 어떻게 대통령이…….” 몇 년 전, 스위스 취리히에서 만난 현지교민은 조국의 동포들을 원망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할 수 있느냐”며. 한국인인 나는 부끄럽고 미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늘날 그 대통령은 탄핵되고 정권은 바뀌었으나 한국사회는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여전히 친일파, 독재자의 후손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태연하고 뻔뻔하게. 떵떵거리며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판·검사로 과도한 권세를 틀어쥐고 있다.

고위 공무원이나 재벌기업인으로 갑질을 일삼고, 사이비 성직자나 교수로 주제 넘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일명 ‘기레기’ 언론인들은 역병 바이러스 같은 가짜뉴스를 퍼뜨리고 있다. 심지어, 그중 누군가는 차기 대통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조사하면 대통령(왕), 군인(장군), 기업인(장사꾼) 등이 주로 앞자리를 차지한다. 많은 한국인들이 아직도 자본의 노예, 권력의 부하, 욕심의 포로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스위스 국민들은 좀 다르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 1위는 과학자 아인슈타인이다. 그 다음 2위는 이름도 생소한 협동조합 사업가다. 고틀리프 두트바일러(Gottlieb Duttweiler). 1941년 본인 소유의 소비자협동조합 미그로(Migros)를 협동조합으로 전환, 스위스 국민들에게 공유했다. 협동조합으로 서로 협동하고 신뢰하는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스위스 국민들에게 선물한 것이다.

 

 

- ‘집권’하지 않는 스위스 대통령

왕이나 대통령 같은 권력자가 아닌 과학자나 협동조합인을 존경하는 스위스 국민들도 존경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친일파, 독재자, 재벌기업인을 대통령으로 기꺼이 선출하는 한국의 현실을 그들에게 설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스위스는 대통령도 한국의 대통령과 차원이 다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일 뿐 행정부 수반이 아니다. 그렇다고 행정부 수반을 따로 두지 않는다. 4년 임기의 7명의 각료가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공동으로 정부를 운영하는 일종의 집단 지도체제 ‘스위스 식 회의체’로 운영될 뿐이다.

스위스 대통령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인 셈이다. 권력을 한 사람이 사유하지 않고 정치공동체가 공유한다. 바로 스위스 연방평의회(聯邦評議會) 자체가 스위스의 집합적 국가 원수라고 할 수 있다. 평의회를 구성하는 7명의 위원(연방장관)들이 1년을 임기로 스위스 연방의회에서 선출되는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대통령과 나머지 6명의 연방 장관은 상하관계에 있지 않고 대등한 관계에 놓인다. 대통령은 단지 연방 평의회를 주재하고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직위에 불과하다.

이렇게 스위스 대통령은 ‘집권’하지 않는다.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아무런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럴만한 권력도 주어지지 않는다. 대통령은 그저 국정을 책임지기 위해 ‘통치’만 할 뿐이다. 대통령 마음대로 독단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아예 법으로 못 박아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윤번제’ 대통령제는 19세기부터 갈고 닦아온 지방분권, 직접민주주의의 찬란한 성과로 평가된다.

반면, 한국은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 ‘제왕적’대통령으로 군림한다. 국민의 주권을 모두 위임받은 것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 특히, 지난 권위적 대통령 시절에 한국은 공화국이 아니라 전제군주국처럼 보일 정도였다. 공무원 임면권, 국군통수권, 외교권, 사면권, 법령집행 및 제정권, 지방정부 통제권 등 가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었다.

삼권이 분립되어 있다지만 사실상 국회와 법원도 대통령의 영향력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 책임통치만 하는 ‘분권형 대통령’을

▲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

2019년에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세계 민주주의 지수 1위부터 5위 국가인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스웨덴, 뉴질랜드, 덴마크 등은 모두 의원내각제 국가이다. 높은 국민소득은 물론 노동인권, 교육, 성평등 등 모든 지표에서 상위권인 이른바 선진국들이다.

2020년 1월, 국제투명성기구는 세계 180개국의 2019년도 반부패청렴지수를 발표했다. 100점 만점에 75점 이상인 상위 20개국에서 대통령제를 하는 나라는 4위를 차지한 스위스가 유일하다. 공동1위는 덴마크와 뉴질랜드, 한국은 59점으로 39위.

즉, 국민소득이 높고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청렴한 선진사회는 대통령제가 아닌 의원내각제를 거의 채택하고 있다. 의회가 내각을 불신임할 수 있기 때문에 국민의 요구에 민감하게 대처하므로 책임 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 의회와 내각의 협조 관계로 능률적이고 신속한 행정이 가능한 점 등이 의원내각제의 장점으로 주목된다.

반면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되면서 의회에 대해 책임도 지지 않기 때문에 독재 가능성이 있는 점, 의회와 행정부가 대립할 경우 국정이 효율적으로 운영되기 어려운 점 등 대통령제의 단점에 새삼 주의하게 된다.

최근 일각에서 ‘중임 대통령제’외에도,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한 개헌논의가 활발하다. 가령 대통령은 외교, 안보, 통일 등 국가전체의 발전을 위해, 내각(내치)은 국회에서 선출된 책임총리가 전념하는 식이다. 이른바 선진 민주사회의 실증적 사례를 살펴보고 고민과 연구를 구체화할 때다.

‘통치’는 하되 ‘집권’은 하지 않는 통일된 자주독립 민주공화국의 지도자가 그립다. ‘김구’를 다시 떠올린다.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서 의열단체 ‘한인애국단’를 이끌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을 역임했던 바로 그 ‘김구.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는 않는다”던 그이가 초대 대통령이었다면. 역사에 가정이 없다면, 역사를 새로 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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