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연재에 들어가며..

코로나는 인류에게 자연이 투척하는 최후의 통첩이다. 산업화, 도시화, 세계화로 지구를 무자비하게 공격해온 자본주의에 대한 자연의 ‘대역습’이다. 코로나 이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인류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패닉과 공포에 빠진 세계 각국의 이런저런 전문가들이 앞다투어 예측과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지금 누구의, 어떤 말도 믿기 어렵다. 코로나를 예측하거나 대비하지 못한 주제에, 어떤 공언과 허언을 믿으라는 건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 말고 없는 듯하다. 먼저 자연 앞에 그동안의 과오와 실패를 사죄하는 것. 다시는 자연과 순리를 거스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 절대 자연과 지구 앞에서 ‘까불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 그렇게 기본으로, 자연으로, 인간으로 돌아가는 새로운 전환과 변혁의 길을 열어젖히는 것.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는 것.

그렇다면 코로나 이후 한국사회는 어떻게 될까. 한국인들의 일상과 일생은? 역시 예단하기 어렵다. 섣부른 예측과 전망은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 다만, 기대와 소망을 조심스레 밝힐 수 있을 뿐이다.

지금 2016년의 촛불시민혁명은 무사한가? 촛불시민들의 삶은 안녕한가? 촛불시민들이 일으켜 세운 정부는 순항하고 있는가?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는 잘 돌아가고 있는가? 그렇다고 단언할 자신이 없다.

촛불혁명의 주요 적폐청산 대상이었던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공무원, 법조인 등은 여전히 건재하다. 반성하거나 처벌받기는커녕 오히려 재활하고 부활하고 있다. 적반하장 격으로 공공연한 저항과 반격을 강화하는 지경이다. 반면, 촛불시민의 주역이었던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 등 기층민중, 사회취약계층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고 고통스럽다.

 

▲ 2016년 시민혁명의 촛불이 불타오르던 광화문광장. ‘촛불시민들’은 지금 안녕한가?

- ‘불량국가 한국, 불행사회 한국’에서 탈출을

촛불혁명 이후에도 한국사회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비정상 국가, 불공정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국민들의 고민과 불안은 점증, 심화되고 있다. 물론 코로나 방역 선진국이라는 칭찬을 듣고 있으나 그게 곧 선진사회를 뜻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나는 한국이라는 국가는 불량하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불량하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불행하다고 본다. 개인적인 사회적 불만이나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편견만은 아니다. ‘위험사회, 절망사회’의 세계적 수준의 표본이 바로 한국이라는 조사 보고나 연구결과도 적지 않다.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자살률은 부동의 1위다. 객관적으로 처해있는 현실이 그렇다는 말이다.

우선 한국인은 서로 믿지 않는다. 친구나 이웃도 쉽게 믿을 수 없다. 그래서 서로 협동하거나 공유하지 않는다. 사회적, 정치적 연대가 이루어질 리 없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 남과 여, 청년과 노인이 자꾸 편을 가른다. 남과 북, 영남과 호남, 강남과 강북이 자꾸 금을 긋고 벽을 쌓는다. 사용자와 노동자, 선생과 학생, 관과 민, 발주와 수주자가 갑과 을로 대치해 서로 반목하고 질시한다. 그래야 겨우 나 혼자라도 먹고살 수 있다. 사회적 자본 최빈국에 가깝다.

그렇게 살다보니 한국인은 힘들 때 의지할 친구나 동료 하나 없다. 국가와 정부의 책임과 의무는 개인과 가계가 온통 짊어지고 있다. 사회는 개인을 돌보거나 보살피지 않는다. 감당하기 어렵다.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이 부실하거나 허술하다. 대의정치와 민주주의는 조롱당하고 능멸당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불법과 반칙이 얼마든지 ‘승소’할 가능성이 있다. 공기인 언론과 방송도 돈과 권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사롭게 소유하고 제멋대로 악용할 수 있다.

전문가와 장인은 소멸하거나 소외되고 사이비와 얼치기만 득세하고 난무한다. 친일매국노와 군사독재자의 후손이 도리어 도덕과 정의를 가르치고 노래하는 희비극이 도처에서 성황리에 공연된다. 양아치와 모리배가 사회지도층 완장을 차고 태극기를 독점하고 우리를 뛰쳐나온 동물처럼 광장과 대로를 장악하고 파괴하고 있다. 거짓말과 모함도 우기면 진실과 신앙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 사람 사는 세상으로, ‘정상국가, 공정사회’로

▲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

이렇게 한국사회는, 정신은 잿빛으로 타락하고 물질만 금빛 찬란하다. 공공성과 공동체는 소멸하고 이기주의와 패거리만 득세한다. 무기력증과 모멸감과 복수심이 일상을 지배한다. 신자유주의, 천민자본주의의 완전무결한 표본이다. 이미 사점을 넘어 공생이 아닌 공멸로 돌진하는 양상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불량국가, 불행사회’로 진단하고 규정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불량국가 한국, 불행사회 한국’의 병인과 치부를 낱낱이 고발하려 한다. 코로나 이후 우리 국가, 우리 사회가 ‘정상국가, 공정사회’로 변하는 기대와 소망을 갈구하려 한다.

일단 ‘불량한 정치’가 문제의 뿌리다. ‘한국정치 혁명’이 절실하다. 정치는 한국인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만병의 암세포이다. 자칫 내부의 적에게 고립되기 쉬운 제왕적 대통령, 동네 패거리나 학교 동아리 수준의 유치한 정당, 국회의원을 감투나 완장으로 오용하는 국회, ‘갑질’이 주요업무이자 주특기인 듯한 무례한 행정, 무소불위의 신처럼 스스로 군림하는 법조, 지역의 토건 토호들이 접수한 지방자치 등을 우선 고쳐야 한다.

‘부실한 경제’는 시민들을 빈민으로, 사지로 자꾸 내몬다. ‘한국경제 혁명’이 필수적이다. 재벌 등 기업은 시장권력자로 국민과 고객 위에 군림하고 있다. 애초 사유 상품이 될 수 없는 부동산은 여전히 최고의 유망상품이자 축재수단이다. 돈 놓고 돈 먹는 고리대금업 수준인 금융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식량기지 농업과 농촌도 장사꾼, 외세가 차지하고 있다. 노동자는 회사에서, 상인은 시장에서 자본에게 자꾸 다치고 죽고 내쫓기고 있다.

‘불안한 사회’는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다. ‘한국사회 혁명’을 더 미룰 수 없다. 지혜로운 민주시민을 키워야할 학교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시험기술자를 양산하는 학원장사와 다르지 않다. ‘사람으로서 더불어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이 아니라 ‘친구를 무찌르고 싸워 이기는 법’만 가르치고 있다. 복지를 특혜나 적선이나 구걸이라 칭하며 낙인효과를 찍으려는 자들이 복지예산을 주무르고 있다. 시민이나 응원단 없이 일부 엘리트 운동선수끼리만 독과점하는 시민사회운동도 안타깝다. 마을이나 공동체의 깃발이 난무하는 난민촌 도시는 결국 마을이나 공동체가 될 수 없다. 애초 도시는 마을로 재생될 수 없는 것이다. 최저생계비도 못 버는 늙은 농부들만 무성한 농촌은 농촌이 아니라 농장이나 사막의 모습이다.

‘불쾌한 문화’ 때문에 기분은 더욱 우울하고 암담하게 느껴진다. ‘한국문화 혁명’으로 영혼과 양심이 죽은 사람과 정의와 도덕이 망한 세상을 소생시켜야 한다. 이제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책 속에 길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 채버린 것이다. 나쁜 예술, 나쁜 문학도 염소처럼 힘이 세면 용서를 받는다. 고발도, 고소도 문단권력 앞에 무력하다. 역사적으로 왜곡되고 오기된 야사나 설화 같은 역사가 정사처럼 되풀이되고 있다. 언론도 소통과 진실을 잘 모르는 정부의 차지가 되었다. 기후나 환경이 나빠지면 더욱 불행하게 죽을 수 있다. 종교는 신이 아니라 빌딩과 모금함과 외국의 국기를 모시고 있다.

지금 한국은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천민자본주의’ 격투장이다. 국가는 야생의 정글, 도시는 사각의 링 같다. 수십 년 전 도시와 국가로부터 벗어나 마을로 자발적 유배를 떠난 이유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저 마을에서, 마을사람으로, 자연과 우주의 일부로만 살아가고 싶었으나 그조차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마을에 내려가 살아도 국가로부터,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코로나 자연의 대역습을 기회로, 이제라도 벗어나고 싶다. ‘불량국가 한국, 불행사회 한국’에서 멀리 탈출하고 싶다. 버릴 수 없는 조국 한국에서, 부정할 수 없는 숙명의 한국인으로서 이제 좀 행복해지고 싶다. 단 하루만이라도 ‘사람 사는 세상’, ‘정상국가, 공정사회’의 선량하고 정의로운 민주시민이고 싶다. 그렇게 튼튼한 몸, 올바른 마음으로 겨우 살아가다 깨끗이 죽고 싶다. 그러면, 안 되는가?

 

저작권자 © 단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