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는 없다

우한 폐렴이라고 부르다가 코로나19로 불리는,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사태를 넉 달 남짓 겪고 있다. 그동안 어떤 낯선 일들이 일어났는지 생각해보자.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부담을 쉽게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벌써 ‘포스트 코로나’를 이야기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를 박멸한 포스트 코로나는 있을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적절하게 통제하는 포스트 코로나가 있을 뿐이고 그래서 지금은 새로운 나날을 준비해야 할 때라고 한다.

▲ 이영균 녹색당원

코로나 19로 인하여 새롭게 알게 된 말들이 많다. 그것들은 우리 생각을 바꾸게 했고, 일상을 압박하고 있다. 무엇보다 ‘코로나’라는 말 자체가 새롭다. 없었던 말은 아니지만 이렇게 알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팬데믹, 확진자, 기저질환, 검체, 사회적 거리두기, 온라인 개학, 무관중 경기, 방구석 콘서트, 신천지, KF 마스크, 마스크 5부제, 재난기본소득, 긴급재난지원금 …. 몰라도 되는 말은 없겠지만 모르는 게 좋은 경우가 있는 말들도 많다. IMF라는 말이 그러했고, 평행수라는 말도 그러했다. 평행수는 세월호와 함께 세상에 알려졌다. 배는 뭍으로 올라왔지만 진실은 아직도 건져 올리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말들이 언제나 사회적 불행과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과거 경험에 비춰보면 퍽 씁쓸하다.

하루하루도 많이 달라졌다. 날마다 정례브리핑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힘겹지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이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다. 그 화면에서 우리는 이전과는 아주 다른 그림을 보게 된다. 오른쪽 구석 작은 동그라미 안에서 보았던 수어통역사들이 동그라미를 깨고 나온 것이다. 검정색 옷을 입은 그들은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 새로운 소통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개학 연기를 몇 차례 하다가 궁여지책으로 온라인 개학을 했다. 등교 수업이 걷는 일이라면 온라인 수업은 헤엄치는 일에 비유한다. 교사나 학생이나 얼마나 힘들까? 치료제가 없으니 예방이 최우선 과제였고, 거기에 따른 필수품이 마스크였다. 마스크를 사기 위해 약국 앞에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은 코로나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을 잘 보여주었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마스크 전쟁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 밖에도 달라진 게 한둘이 아니다. 결혼식은 뒤로 미뤄지고, 장례식장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각종 기념일은 무시됐다. 방송도 달라졌다. 지나간 것을 편집해서 내보내기도 한다. 대표적인 겨울 스포츠라고 할 수 있는 배구와 농구는 일정을 중단했다. 프로야구는 관중 없이 경기를 한다. 관중들의 함성에 묻혀 있던, 더그아웃에 있는 선수들 목소리가 안방까지 온다. 문화생활에 목이 마른 시민들을 위해 ‘방구석 콘서트’가 열리고 있다. 대체효과는 있을 것이다. 재난기본소득이라는 말이 나오더니 긴급재난지원금으로 현실화됐다. 이 돈은 기부하는 것도 그 뜻이 크지만, 필요한 데를 찾아 ‘낭비’에 가까울 정도로 빨리 소비하는 게 취지에 더 맞는 일이 아닌가 싶다.

전대미문의 코로나19 사태를 혹독하게 겪으면서 물음도 많이 생겼다. 물음들은 이어지지만 시원한 대답을 스스로 내놓을 수 없으니 ‘전문가’들로부터 답을 구해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가지런하지 못하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어디에서 왔을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인도의 생태운동가 반다나 시바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질병이 생겨나는 이유는, 세계화·산업화된 비효율적인 우리의 식량 및 농업 모델이 다른 종(種)들의 생태적 서식지를 침범하고, 동식물들을 임의로 조작하기 때문이다.”(<녹색평론> 172호 41쪽)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별되며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으로, 인간이 자초한 환란이라는 말이다.

사회적 고통과 혼란이 길어질수록 하루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물음들. 언제까지 지금과 같은 사회적(생활 속) 거리두기를 하고 살아야 할까? 그리고 언제쯤 치료제가 나와서 지금과 같은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우석균 공동대표의 말에 따르면 적이 비관적이기도 하다. 천운이 따르기를 바랄 뿐이다.

“답은 백신이 나올 때까지이다. 그럼 언제 백신이 나올까. -- 최소 1년 내지 18개월이라고 이야기한 사실은 이제는 잘 알려져 있다. -- 그런데 막상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1년 내지 1년 반조차도 ‘천운이 따르면’이라고 이야기한다.”(<녹색평론> 172호 13쪽)

과연 이전과 같은 나날로 돌아갈 수 있을까? 모두가 소망하는 일이지만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전망도 있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은 어떤 삶이 ‘정상적’인 생활인지 생각해보자고 한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를 고대하며, 백신이나 치료제의 조기 개발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종래의 생활이 과연 ‘정상적’인 생활이었는지 우리는 냉정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최근 언론보도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뉴스의 하나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소비와 산업 활동이 일시적이나마 정지 내지 둔화되자, 화석연료 사용량이 대폭 줄어든 것은 물론, 대기가 청명해지고, 소음이 잦아들고, 자연 만물이 모처럼 생기를 되찾았다는 소식이다. 이는 종래의 생활이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확연한 증표가 아닌가.”(<녹색평론> 172호 5쪽)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홍기빈 소장은 ‘비관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늘날 지구적 위기의 근본 원인은 산업혁명이 아니다. 무제한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고방식이다. 과거 인류사 어떤 문명도 무제한의 욕망을 허용하지 않았다. 무제한 소비, 무제한 욕망이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사고방식은 200~300년밖에 되지 않았다. 산업혁명, 환경 파괴는 그 결과다. 지금의 생존방식을 인류가 고수하는 한, 제2, 제3의 코로나19 사태는 언제든 나올 것이다. 어렵다고 생각하겠지만 비관하지 않는다. 비상시 문화는 생각보다 빨리 변한다. 이 같은 국면에서 코로나19 사태는 지구가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읽힌다.”(<프레시안> 2020. 3. 27)

‘지구가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딱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 곧 새로운 나날을 구상하라는 것 아닐까.

김누리 교수(중앙대 독문학과)는 ‘자본주의를 인간화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지금과 같은 형태로 자본주의가 작동한다면 22세기는 오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한 세기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외쳤다. 최근 독일 중고등 학생들의 시위를 보니 ‘자본주의냐 삶(생명)이냐’라고 목청을 높인다. 자본주의를 위해 삶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삶을 위해 자본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자본주의를 인간화해야 한다.”(<한겨레> 2020. 5. 11)

코로나19로 말미암아 상상을 넘어서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배움도 있어야 마땅하다. 그 배움의 중심에는 ‘코로나19’를 잊지 말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으로 나아가자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시련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련을 극복한 지혜가 새로운 희망으로 거듭났으면 좋겠다. 이 또한 곧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지금까지와 같은 생태계 파괴가 이어진다면 ‘포스트 코로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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