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강이 시작되는 람천을 따라 걷다.

▲ 4월 지리산 초록걸음에 함께한 사람들(사진=최세현)

2020년 4월, 코로나에 세월호까지 여전히 침묵의 봄이고 잔인한 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또 발걸음을 내디뎠다. 멀리 원주에서 달려온 길동무까지 20여 명의 지리산문화예술학교 초록걸음반 학우들은 이제 막 새순이 꼬물꼬물 솟아나기 시작하는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에서 걸음을 시작했다.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마을 숲 대상을 받은 길이지만 지금은 주변 시설들이 방치되다시피 해서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수목이나 주변 시설물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인 관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번 구간은 덕유산과 더불어 남강의 또 다른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세걸산(1,207m)에서 시작되는 람천(濫川) 둑길을 따라 운봉읍을 지나게 된다. 이 둑길은 운봉 출신의 간호장교였던 박말순 할머니가 왕벚나무 125주를 기증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지금은 명품 벚꽃길 12Km가 조성되어 있다. 하지만 해발 450m가 넘는 고원지대인지라 이 길에는 이제 막 벚꽃이 피기 시작했고 4월 마지막 주쯤이나 되어야 만개할 듯 했다. 그래도 살랑이는 봄바람 맞으며 걷는 길은 우리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는데, 지리산 둘레길 22개 구간 중 유일하게 고개 하나 없는 구간이라 더더욱 홀가분하게 걸을 수 있었다.

 

▲ 4월 지리산 초록걸음(사진=최세현)

운봉읍에 있는 서림공원을 지나 도착한 신기마을, 아마도 우리나라 마을 이름 중에 가장 많은 이름이 신기(新基) 즉 ‘새터’이지 않을까 싶다. 마을회관에 다다르자 보기 드물게 군락을 이룬 자주광대나물이 우리를 반겨주었으나 굳게 잠긴 마을회관은 코로나19의 영향이 이곳을 비켜 가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마을회관 대신 잘 자란 느티나무 아래 정자에서 길동무들과 사회적 거리를 두고 각자 가져온 도시락으로 봄 햇살을 반찬 삼아 맛난 점심을 먹었다.

이번 초록걸음도 원점회귀라 동편제의 가왕 송흥록과 국창 박초월 생가가 조성되어있는 비전마을을 반환점으로 해서 다시 출발지인 행정마을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곳 비전마을에서 길동무들과 봄바람을 만끽하며, 미리 엄선해 둔 시 한 편을 들려드렸다. 벚꽃이 난분분할 거란 기대로 준비해 온 시였다.

 

▲ 4월 지리산 초록걸음(사진=최세현)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 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 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놓아 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 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동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 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하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 4월 지리산 초록걸음(사진=최세현)

비록 벚꽃잎 난분분 흩날리는 꽃길은 아니었을지라도 길동무들끼리 딱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 지리산 둘레길, 한나절만이라도 지구촌에 창궐한 코로나19로부터 벗어나 자연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던 발걸음이었음은 분명했으리라. 다시 돌아오는 람천 둑길을 걸으며 이 지리산의 기운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퇴치하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다가오는 5월엔 정말 홀가분하게 초록걸음을 걸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 4월 지리산 초록걸음(사진=최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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