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전이라 하면 흑백 텔레비전으로 보던 ‘프로레슬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박정희가 경찰과 군인, 공무원 조직으로도 모자라 깡패까지 동원해 폭압적인 공포정치를 펼치던 그 시절, 사람들의 눈과 귀를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프로레슬링이었다.

귀화 일본인 역도산의 제자 김일이 반칙을 일삼는 일본 레슬러들을 박치기 하나로 제압하는 장면을 보며 사람들은 열광했고, 암울하고 고통스런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축구나 야구와 같이 경제력과 조직력이 뒷받침돼야 어느 수준에 오를 수 있는 스포츠는 일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나마 복싱과 프로레슬링과 같은 격투기 종목은 경제력과 상관없이 정상을 노려볼 수 있는 스포츠였다. 게다가 주먹과 주먹, 몸과 몸이 부딪혀 피와 땀이 범벅되는 장면이 연출되다 보니 사람들은 쉽게 흥분하고 뜨겁게 열광했다.

▲ 서성룡 편집장

프로레슬링은 경기 흐름과 결과를 얼마든지 조작하고 연출할 수 있어서 사실상 연극에 가까웠지만, 한국 선수들이 일본 선수들을 때려눕히는 장면만큼은 열패감에 젖은 국민들의 자존감을 위안하기에 충분했다.

아무도 한국 ‘선수’가 일본 ‘선수’를 이겼다고 말하지 않았다. ‘한국이 일본을 때려 눕혔다’고 말했고, 그것은 박정희의 계산과 딱 들어맞는 결과였다. 그렇게 프로레슬링과 복싱은 박정희의 스포츠정치 선동물로써 한 시절을 풍미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삼십 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의 경제력과 민주주의, 문화 경쟁력은 일본의 그것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 물론 여전히 일본은 기초과학 분야와 첨단 산업 분야에서 세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도 있고 따라잡아야 할 부분도 있는 나라지만, 일본에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잊을만하면 반복되는 일본 정치인들의 침략전쟁에 대한 적반하장격 도발과 망언 릴레이는 대외용이라기보다 대내 정치용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이번 4.15 총선을 앞두고 갑자기 ‘한일전’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미통당쪽 사람들을 뭉뚱그려 친일세력으로 정의하고, 그에 맞서는 민주당 계열이 민족해방 혹은 민족 정통성을 이어받은 집단으로 은연중 암시한다.

그러니 민주당을 비판하면 대번에 “너도 친일파냐”는 반격이 가능하고, 대안적인 소수정당들에 대해서는 “결국 친일파를 돕는 세력”이라는 공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마치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면 “너 북조선에서 왔냐”라든지, “결국 그게 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며 잡아 가두던 것과 꼭 닮았다.

일차원적인 대결 구도를 만들거나 적국을 내세우거나 가상의 적을 만들어 ‘전쟁’에 버금가는 대치국면을 만들게 되면, 큰 노력을 들일 필요 없이 선거를 치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안에 대한 토론과 다양한 의견을 잠재우고, 침묵을 강요하도록 만들어 정치를 퇴행시킨다. 정치의 주인공이라는 유권자의 목소리를 배제시키고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이런 퇴행을 근본적으로 막고자 시행된 것이 비례대표제도다. 그것을 확대해 지역구 선거 결과와 연동시켜, 유권자의 지지도와 표심을 의석수에 정확히 반영하자는 것이 완전연동형 비례대표제고.

하지만 이에 대해 미통당은 처음부터 반발했고, 민주당은 반대할 명분이 없어 찬성하는 척 하다가 끝내 지난번과 똑같은 47석만 비례의석으로 하되, 30석은 모자를 씌워 비율 조정용으로 쓰겠다는 그야말로 눈곱만큼의 양보를 해서 도출된 것이 현재의 선거제도다.

그러나 이 눈곱만큼의 양보마저도 민주당은 걷어차 버렸다. 애초부터 반대한 미통당의 일탈을 핑계로 두 개나 되는 허깨비 정당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참여하지 않는 정의당을 압박했다. 한편으론 막상 참여하고자 한 녹색당과 민중당은 온갖 핑계를 들이대며 배제시켜 버렸다.

“유권자를 배반하지 않는 선거제도를 꿈꾼다” 이 말은 2년 전 ‘진주같이’라는 시민단체가 비례대표제 강화를 위해 벌인 토론회의 제목이었다. 여기엔 민주당 지역위원장과 당직자, 정의당 도의원, 민중당 출마자가 토론자로 참석했고, 최근 비례연합정당의 물꼬를 튼 하승수씨가 기조 발제를 맡았다.

당시만 해도 자유한국당(현 미통당)의 반대가 있더라도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정착과 확대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확대되는 의석수가 얼마나 될지, 의석을 300석 이상으로 늘릴지 고정할지, 전국단위 비례로 할 것인지 권역별로 할 것인지가 논란이었다.

일부에선 자한당의 위성정당 창당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결국 악수가 될 것이라 모두들 예상했다. 민주당이 비례정당을 추진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됐을는지 모른다. 정말로 자한당 세력을 소수정당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지배적이었다면, 선거제도와 개혁입법을 뭉뚱그려 패스트트랙으로 올릴 때 비례의석을 전체 절반 이상으로 확대하고 완전연동형으로 했다면, 현 미통당 의석을 30%정도로만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위성정당을 만들어 국민이 열망하는 합리적인 선거제도를 무너뜨리려 한 책임을 미통당에게 물어 심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자 대결구도로 갔을 때 힘들이지 않고 얻어온 어부지리 의석이, 소수정당쪽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선거는 ‘전쟁’이 아니다. ‘한일전’은 더욱 아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의료민영화를 막아내고 공공의료를 지켜내느냐 마느냐의 문제이고, 논밭을 메우고 산을 깍아 공장 부지를 조성해 대기업 유치하느냐 자연을 보존해 다음 세대의 생명권을 지키느냐의 문제,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일자리를 만드느냐 비정규직과 자영업자를 양산하는 불안한 일자리를 늘리느냐의 문제, 성차별적인 사회를 지속시키느냐 평등으로 나아가는 사회로 만드느냐의 문제이다.

그 모든 곳이 전선이고 싸움터다. 그래서 유권자들이 더 똑똑해져야한다. 사회에 대해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참여해서 모두가 건강해져야 가능한 것이 제대로 된 정치이고 선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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