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의 상황과 처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성노예’라는 단어를 2020년 현재를 보도하는 미디어에서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최대 26만 명으로 추정되는 가담자들, 피해자들을 노예 혹은 물건처럼 다루며 온갖 학대와 요구를 하는 가해자 등, 매체를 통해 보도되고 있는 범죄의 형태가 너무 끔찍하여 놀라고 화난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노예’라는 단어가 처음 적용되었을 뿐, 이러한 범죄는 2020년 오늘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장자연 사건, 김학의 사건, 버닝썬 사건, 양진호의 웹하드 카르텔, 웰컴 투 비디오의 손정우 사건, 여성을 비하하고 품평하며 여성의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하던 기자, 대학생, 고등학생들의 수많은 단톡방들이 그 토대가 되어 나타난 것이 텔레그렘 N번방 사건이다. 반일종족주의 저자 중 한 사람인 이우연이 SNS에 올린 ‘먼저 피해자의 반성을 요구한다는’ 취지의 글에서 드러나듯 이는 일제강점기의 ‘위안부’ 문제와도 이어져 있다.

▲ 강문순 발행인

이처럼 여성을 성착취하는 문제가 진화를 거듭하면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 범죄들이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범죄사실과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부터 다크웹을 통해서 아동 성착취물을 유포하고 판매한 손정우에 주어진 1년 6개월의 너무 작은 처벌까지, 우리 사회는 이런 범죄들을 너무나 관대하게 다루어 왔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텔레그램의 N번방과 박사방이다.

처벌이 제대로 되지 않는 데에는 우선 법적, 제도적 미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박사방에 참여한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듯이 나날이 진화하고 있는 성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는 미비한 실정이다. 다른 하나는 입법부와 사법부 등의 안이한 인식과 대응이다. N번방 사건으로 국회청원이 이루어진 후, 국회 청원 1호 법안이라는 성폭력특별법 개정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흘러나온 국회의원과 법무부 인사들의 발언은 이런 사건들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성착취물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성매매와 마찬가지로 수요가 있는 한 공급이 멈추지는 않는다. 70만 원이니 150만 원이니 하는 돈을 지급하고서라도 성 착취 동영상을 보겠다는 사람이 누적하여 26만 명에 이르고, 박사가 체포된 이후인 지금도 여전히 동영상들이 거래되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 이런 성착취물에 대한 수요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성문화가 가해자 남성에게는 관대하고 피해자 여성에게는 착취적인 강간문화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또 다른 N번방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도 결국 앞서 말한 이 사건의 원인들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우선적으로는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 동조자들을 모두 검거하여 그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폭력적이고 여성착취적인 우리 사회의 강간문화를 몰아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 폭력과 성인지에 대한 감수성을 기를 수 있도록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피해자들이 어디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피해의 어느 시점에서 그들이 이야기하든 그 이야기를 비난 없이 들어주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 가해자의 협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부터 자신의 폭력감수성과 성인지 감수성을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가해자를 만들어 내는 우리의 성인식과 성문화를 살펴보고 고쳐나가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 강간문화에 이바지한 바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법을 제대로 정비하는 것이다. 현행 형법에서는 성폭력 범죄를 강간과 성추행을 중심에 놓고 다루고 있다. 이는 성폭력 범죄를 신체적 접촉을 기준으로 하여 보는 것을 의미하는데 거기다 형법의 297조 강간 조항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라고 하여 ‘폭행과 협박’이라는 전제조건을 달고 있다. 이처럼 신체적 접촉을 중심으로 하고 ‘폭행과 협박’을 그 전제조건으로 하는 법 조항은 신체적 접촉이 없는 디지털 성범죄(이 범죄에 관한 것은 성폭력특별법에서 다루고 있으나 이 역시 미비한 점이 많다)나 신체적 폭행이 아닌 심리적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성범죄를 다루지 못하는 등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에 여성계와 몇몇 정당에서는 강간죄의 구성요건을 ‘폭행과 협박’에 두는 것이 아니라 ‘동의’에 두는 ‘미동의간음죄’로 개정하자는 요구를 하고 있다. 21대 국회가 시작되면 이 ‘비동의간음죄’에 대한 논의가 먼저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날로 진화해가는 성범죄들을 제대로 처벌할 수 있도록 입법 또는 법 개정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모두가 함께 우리의 성문화를 바꿔나가고 법, 제도를 정비해 나가야만 성착취물의 수요와 공급을 줄이고 또 다른 N번방의 출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텔레그램 N번방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며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not all men’이라고 억울함을 주장하는 선량한 남성들에게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우리도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모든 남자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성문화가 여성혐오적이고 여성착취적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다른 문제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남성중심적이고 여성착취적인 강간문화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 강간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N번방 사건은 계속해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그러므로 지금 우리 남성들이 해야 할 일은 ‘not all men’이라고 항변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과 함께 분노하고, 선량한 나에게조차 이런 누명을 씌우는 우리의 성문화를 바꾸기 위해 힘을 보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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