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걸음을 이어간다.

▲ 3월 초록걸음에 함께한 사람들(사진=최세현)

다시 꽃피는 봄이 왔지만 초록걸음을 시작해야 할지 참 많은 고민을 했다. 온 나라가 코로나19 위기로 모든 일상이 움츠려 들어버린 이 시기에 둘레길을 걷는다고 한다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권장하고 있는 정부 시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처럼 보이진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긴 고민 끝에 언제나 아픈 대한민국을 어루만져주던 어머니의 산, 지리산의 빽(?)을 믿고 예정대로 걸음을 이어가기로 했다.

올해 초록걸음은 지리산문화예술학교 수업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전국에서 수강 신청을 한 25명의 학우들이 길동무가 되기로 했다. 지리산문화예술학교는 열린 학교, 움직이는 학교로 정해진 교실은 없으나, 지리산 자락 곳곳을 교실로 사용하고 남녀노소 누구나 다닐 수 있다. 매월 1회 정해진 주말에 수업이 진행된다. 올해는 초록걸음반, 산야초반, 시문학반, 목공예반, 화첩기행반, 티브랜딩반, 벽돌인테리어반이 개설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3월 초록걸음은 원점회귀 코스로 산수유마을 구례 현천마을에서 시작해 연관마을과 계척마을을 지나 밤재 넘기 전 600년 된 푸조나무를 반환점으로 해서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기로 했다. 교차 오염을 우려해서 현천마을까지 오는 교통편을 대중교통보다는 자차를 이용해달라고 한 까닭이었다. 첫 수업이라고 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까지 내린 탓에 참가자는 10명에 불과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를 뚫고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열혈 길동무들이었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산수유꽃으로 꽃대궐을 이룬 현천마을을 출발했다.

 

▲ 3월의 초록걸음(사진=최세현)

현천마을에서 연기마을로 가는 길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은 운무에 휩싸여 말 그대로 선경을 이루고 있었다. 빗속의 둘레길을 걸어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비를 맞으며 걸을 때 지리산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다’. 그 말은 이번 초록걸음에서도 증명되었다. 특히 비옷에 우산 쓰고 걷는 길동무들의 뒷모습은 그 자체가 또 다른 꽃이었다는 사실도....

계척마을 도착 전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자를 만나 도시락을 풀었다. 폴폴 날리는 매화 향기는 또 다른 반찬이 되어 주었다. 매화는 추위에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지만 비에도 그 진한 향기는 젖지 않는 듯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걱정에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밥을 먹고는 시와 음악이 있는 초록걸음에 걸맞게 준비해온 시와 음악, 비 온다는 일기예보에 골라온 곽재구 시인의 ‘봄비’와 지리산 10경을 읊은 낙장불입 이원규 시인의 시, 안치환이 노래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을 길동무들에게 들려 드렸다. 지리산스러운 후식이길 바라면서...

 

▲ 3월의 초록걸음(사진=최세현)

봄비 / 곽재구

 

익은 꽃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세상 주유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좋은 일

 

아직 덜 핀 어린 꽃들이

꽃샘추위에 툭툭 떨어져

새 삶의 거름이 되는 것도

좋은 일

 

꽃이 아닌 인간들이

촛불 하나씩 들고

어둠 속 길 깜박깜박 걸어가다

두 손 두 무릎

고요히 모아

 

세상의 메마른 봄 흙 위에

작은 무지개 깃든

눈물 떨구는 일

좋은 일

 

▲ 3월의 지리산 풍경(사진=최세현)

오후에도 비는 계속 오락가락했지만 우리들의 발걸음은 계속 되었다. 계척마을 그 자리에서 천수를 누리며 지금까지도 봄이 되면 노란 꽃등불을 밝히시고 가을에는 어김없이 빨간 산수유 열매를 풍성하게 매달고 계시는 이 땅의 원조 할머니 산수유나무 앞에서는 지나온 천년의 세월이 느껴져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예전 이맘때 같았으면 이 산수유 시목지 공원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을 텐데 개점휴업 상태인 동네 가게들을 보면서 짠한 마음에 안타까움이 더해졌다.

계척마을을 뒤로 하고 밤재로 향하는 길은 지리산 둘레길 전체가 마지막으로 완전 개통된 길로 구례와 남원을 잇는 길이기도 하다. 이번 초록걸음에서는 밤재 넘는 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밤재 가기 전 600년 된 푸조나무를 반환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그 푸조나무 어르신을 만난 길동무들은 아직도 저런 멋진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그 비결을 부러워들 했다. 필자는 둘레길에서 숱한 노거수들을 만날 때마다 이 땅의 역사를 그 나이테 속에 켜켜이 기록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곤 한다.

다시 현천마을로 되돌아오는 길, 편도로 둘레길을 걷는 것과는 달리 원점회귀할 때면 바둑의 복기처럼 둘레길에서 만났던 풍경과 뭇 생명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참 좋다. 아무튼 코로나19에 비까지 더해져 마냥 편치만은 않았던 초록걸음반 첫 수업이었지만 지리산의 이 봄기운이 온 나라를 감염시켜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완전히 종식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걸음을 마무리했다.

 

▲ 3월의 지리산 풍경(사진=최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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