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e Bunt glasfenster, Oil on Canvas 92.5x73.5cm. 1914

외광(Plein air) 속에서 사물이 반사해내는 빛을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놓는 것을 신념으로 삼은 인상주의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 그런 흐름의 반대쪽 세계에서 상상과 관념의 모호함을 추구한 화가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이다. 그의 본명은 ‘Bertrand Jean Redon’인데 ‘오딜롱’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의 어머니 이름 ‘오딜르(Odile)’로부터 유래한다. ‘르동’은 ‘모로’(Gustave Moreau) 에게 의해 영향 받은 바 큰데 ‘모로’는 ‘르동’보다 한 세대 앞서 활동한 화가로서 낭만주의와 상징주의를 연결하고, 사실주의적 미술에 반대되는 경향을 선도한 화가로 인정받고 있어 ‘르동’이 가진 미술사적 위치와 비슷한 면이 있다.

▲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하지만 ‘르동’과 ‘모로’, 두 화가는 큰 차이가 있다. ‘모로’는 신화나 전설, 역사 관련 주제를 통해 ‘보편’적 정서를 자극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반해, ‘르동’은 대상을 매우 ‘주관적’인 해석으로 표현하여 보통의 상식으로는 완벽한 이해가 어려운 모호함(Obscurity)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테면 ‘모로’의 그림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며 그의 화면은 마치 연극 무대와 같은 공간감을 가지는 데 반해, ‘르동’의 그림은 일견에 맥락(Context)이 파악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배경에는 ‘르동’의 동양 사상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다. 물론 당시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자포니즘이었다. ‘르동’ 또한 자포니즘에 심취하였다. 하지만 ‘르동’은 자포니즘을 기초로 하여 보다 더 깊이 있는 동양사상에 심취하게 되는데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관심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의 그러한 사고의 확장을 반영한 작업으로 부처의 죽음(The Death of the Buddha, c. 1899)과 부처(The Buddha, 1906) 등의 그림이 있다.

중세의 교회 건축 양식에서 고딕 양식이 가지는 의미는 벽체와 유리창의 활용이다. 지붕 면이 뾰족해지고 높이가 높아지면서 벽체에 받는 지붕의 하중이 상대적으로 가벼워져 이전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바로크 비잔틴 양식에서 보다는 여러 개의 기둥들을 줄일 수 있음으로써 상대적으로 넓어진 벽체와 그 벽체의 밋밋함을 해소할 수 있는 창문은 고딕 양식의 건축물의 예술적 가치를 더욱 높이게 했다. 특히 교회 건물 정면에 배치된 둥근 장미 창(Rose window)과 그 창을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는 보는 이로 하여금 천국의 화려함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르동’의 이 그림도 교회 장미 창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그린 것인데 위에서 말한 것처럼 특정 장소의 상세하고 정교한 창이라기보다는 장미 창이 가지는 일반적 특징만을 묘사하고 느낌만은 ‘르동’ 특유의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

 

▲ Die Bunt glasfenster, Oil on Canvas 92.5x73.5cm. 1914

몽상적인 색채를 기본으로 한 바탕 위에 푸른색을 중심으로 한 장미 창의 빛이 붉은색으로 확산되고 있다. 붉은색 계통의 색채들이 경계를 허물고 있으며 장미 창의 끝부분으로 갈수록 어두워지는 명암의 대비를 통해 묘한 신비감을 형성하고 있다. 두 개의 기둥 사이에 위치한 화려하지만 약간은 모호한 채색의 느낌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장미 창 밑으로 피에타 상이 위치하고 있다. 성모와 예수를 같이 묘사한 피에타 상을 그림의 중앙이 아니라 한편에 두고 오히려 장미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이 교회 바닥에 반사되고 그 반사된 빛이 피에타 상과 장미 창 밑을 환하게 비추는 기묘한 빛의 순환을 보여주고 있다.

‘르동’은 1870년 그의 나이 30세 때 보불전쟁에 참전한다. 이 전쟁의 참전은 ‘르동’의 삶에 있어 또 다른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즉, 그는 전쟁 이후 본격적인 자기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 시기가 그의 작품 경향을 ‘낭만주의의 검은 연기’라고 부르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검은색(Noirs)’의 작품 제작에 몰두하게 된다. 이 검은색은 그의 개인적인 삶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르동’은 1840년에 프랑스 남부 보르도에서 출생했으나, 태어나자마자 리스뜨악 메도흐에 있는 페헤를르바드의 가족 소유 농장으로 보내져 11살 때까지 외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오랫동안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부모의 불화, ‘르동’의 지병, 모친의 질병 등 여러 설이 있다. 이 시기에 부’모로’부터 버려진 듯 한 느낌을 받았던 ‘르동’은 이곳에서의 어린 시절은 어두움, 침묵, 상상의 시간으로 기억되었고 이것이 ‘검은색의 원천’이라고 스스로 고백하였다.

다행히도 이 그림은 1912년 그의 말년 작품으로서 ‘검은색’의 주조를 이루던 시절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빛나는 색채’와 ‘고요한 서정성’의 시대에 당도한 시기에 그려진 것이다. 장미 창으로 들어오는 은근하지만 화려한 빛은 말년의 ‘르동’이 추구하고자 했던 외부보다는 내면을 향한 시선, 외양보다는 본질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하여 꿈과 같이 신비롭고 모호하며 암시적인 이미지를 지향하는 ‘르동’의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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