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후보가 우리의 대표가 될 때 권력행위는 천사의 수단이 된다.

4.15 총선이 두 달 앞으로 다가오면서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볼 수 있는 풍경을 또 한 번 본다. 금배지를 가슴에 달고 싶어 분투하는 후보들의 모습은 여느 선거와 다르지 않다. 자신이 이 사회의 엘리트고, 좋은 학벌과 경력을 가졌다며 고개를 치켜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모두가 시민 앞에 고개 숙이고 좋은 사람인 척 미소 지으며, 악수를 청한다.

대다수 후보들은 가면 속 자신의 모습을 감춘다. 누구보다 지역과 사회를 위해 헌신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가면을 쓰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다. 또 다른 의미의 안면몰수이다. 고가의 성형수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거짓에 능숙할수록 가면은 화려해진다. 가면의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후보 자신도 이것이 가면인지 아닌지 분간하지 못한다.

거짓된 가면은 언젠가 벗겨지게 마련이다. 이들은 선거철이 끝나면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모습을 드러낸다. 겸손의 끝을 보이며 매일 아침 손을 흔들고, 어디까지 꺾일지 궁금할 만큼 고개와 허리를 조아리던 이들은 고개를 치켜들고 내가 이 사회의 엘리트이자 권력자라며 시민 앞에 군림한다. 시민이 준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다.

▲ 김순종 기자

좋은 후보를 선출하려면 그들이 쓴 가면 속 모습을 봐야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내세우는 공약들은 종종 너무나 쉽게 그들의 가면을 찢어발긴다. 그들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그들이 내세운 헛된, 빈, 장밋빛 공약을 조금만 따져보면 그들이 유권자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알 수 있다.

선거가 본격화되면서 지역에서도 유권자를 우습게 여기는 듯한 공약을 발표하는 후보들이 적잖게 눈에 띈다. 허무맹랑한 공약, 실현 가능성이 낮은 공약도 문제이지만, 시민들의 욕망만을 자극하는 공약, 지역을 개발하면 모든 시민들이 행복해질 것처럼 내세우는 개발주의 공약이 그런 것들이다.

중앙정부의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대규모 예산을 따오겠다는 것이나 인구 35만에 불과한 도시에 세계적 명소를 만들겠다는 공약, 대규모 공공기관이나 기업체를 가져오겠다는 주장들을 보면 헛웃음이 난다. 실현 가능성도 문제이지만, 그런 것들이 지역민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그들이 이같은 공약을 내세우는 것에는 시민들의 잘못도 있다. 가슴에 금배지 한 번 달아보겠다는 이들이 개발주의 공약을 앞세우는 건 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남부럽지 않은 도시를 만들겠다는 그 헛된 약속에 매 선거마다 기대를 걸고 배신당했지만, 시민들은 또 한 번 같은 기대를 보낸다.

정치에 관한 다양한 정의들이 있지만, 여전히 학계에서 통용되는 것은 데이비드 이스턴의 ‘한 사회의 자원을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행위’라는 말이다. 그것은 본 의미와는 다소 달리 우리 정치 현실을 꿰뚫는다. 권력을 얻어 우리 지역에 어떻게든 더 많은 예산, 자원을 가져와 수요가 있든 없든 개발해놓고 보겠다는 행위가 정치가 된다.

그렇게 예산과 자원을 가져오고, 수요 없는 공급과 개발을 한다고 시민들이 얼마나 행복해질까. 그간 지역 국회의원들은 적지 않은 예산을 확보해 각종 개발사업을 추진했는데, 시민들은 얼마나 행복해졌는가. 살림살이는 나아졌는가. 그것을 돌아본다면 이번 총선에서 누구에게 표를 줘야 할지 자명해진다.

좋은 후보는 우리가 가진 욕망을 자극하며 헛된 기대를 품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사회의 병든 곳을 치유하고, 낮은 곳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다. 그들의 공약은 개발주의가 아닌 인본주의를 향한다. 그들도 사람 좋은 가면을 쓰곤 하지만, 엄중한 얼굴로 유권자를 꾸짖을 줄 안다. 선거의 당락보다 자신의 신념을 평가받길 바란다.

그런 후보가 쉬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다만 선거국면에 당부하고 싶은 것은 좋은 후보가 없다면 차선의 후보를, 차선이 아니라면 차악의 후보를 선출하자는 것이다. 정치란 악마의 수단(권력)으로 천사의 대의(공익)를 달성하는 행위라 했다. 조금이나마 좋은 후보를 우리의 대표로 선출할 때 악마의 수단인 권력행위는 천사의 수단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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