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ill-leben mit Partitionen, Handschuhen und Kreuzbogenpfeilen, Oil on Limewood. 49 × 42 cm.

생명 없는 것들이나 이미 죽어 버린 것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고대시절부터 있어 왔을 터이지만 서양 회화에서 본격적으로 이러한 사물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6세기경부터로 알려져 있다. 우리말 ‘정물화’라는 이름은 아마도 지나온 일제강점기 시절, 처음으로 이런 종류의 서양 그림들이 우리에게 소개되면서 영어‘Still-life’가 일본식 한자로 번역되어 만들어진 어쭙잖은 조어(造語)였을 것이다. 말 그대로 조용히 있는 물건이라는 뜻인데 영어의 ‘Still-life’가 가지는 의미와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 정물화라는 이름이 어색한 것은 우리에게도 이런 종류의 그림들은 있었지만 다만 그 그림들에는 ‘화제’, 즉 그림의 제목으로만 불려졌기 때문에 따로 그림들의 종류를 지칭하는 이런 단어는 필요 없었을 것이다.

Jacopo de Barbari(c. 1460/70~1516, 자코포 데 바르바리 또는 바르히)가 화면의 하단에 메모 형식을 빌어 표기해 놓은 이 그림의 이름은 철장갑과 자고새가 있는 정물 정도가 되는데 1504년 그린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아마도 정물화로서는 거의 초기의 작품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르바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로서, 태어난 곳은 이탈리아 베니스였지만 죽은 곳은 네덜란드이다. 1500년 그는 베니스에서 독일로 이주하였다가 1510년경부터 네덜란드 일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이런 행적으로 보아 그는 이탈리아 북부, 즉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에 이탈리아 회화를 전파시킨 주요 인물일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 김준식 지수중학교 교장

서양의 정물화는 꽃이나, 책, 물고기, 과일 혹은 악기 등의 다양한 물체들을 일정한 장소에 배열하고 그리는 그림이기 때문에 작가의 사전 배열(구도)이 어떤 그림보다도 절대적인 그림이다. 그리고 그 물건들 중 일부는 한 때 생명을 가졌던 것으로서 그림 속에서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물건(생명이 멈춘 채; 이런 이유로 still-life라는 이름이 생겼을 것이다.)들이 그림의 대상이었다. 물건들은 대개 실내의 특정 공간 혹은 테이블 위에 정렬되어 그려져 있는데, 작가의 의도에 따라 아주 다양한 정물들이 이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이러한 정물화의 전성기였던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에 등장하는 해골이나 나침반, 그리고 앵무조개, 빵, 과일 등의 정물들은 삶과 시간의 의미 있는 관찰을 통한 작가의 가벼운 권고에서부터 삶의 철학에 이르는 메시지까지도 숨어 있다.

이 그림에서 특이한 것은 그림의 작가와 제목을 그림 속에 색다른 장치, 즉 마치 완성된 그림 위에 메모지를 붙여 놓은 것처럼 착각할 만큼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그림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의 회화적 묘사 방법을 우리는 trompe l'oeil(트롱프뢰유 - optical illusion: 착시)라고 부른다. 아마도 이 그림은 ‘트롱프뢰유’의 방식으로 그린 초기의 그림일 것이다.(이 기법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대중화된다.) 사실 회화의 역사에서 작가의 사인과 그린 시기를 정확하게 표현한 것은 르네상스 시절 이후에나 가능했는데 그러한 방식을 사용한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은 독일 출신 알프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였다. 하지만 당시의 환경과 상황을 고려해볼 때 이 방식은 바르히의 독자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림을 보면 꿩과에 속하는 자고새 한 마리가 쇠로 만들어진 장갑, 그리고 화살과 함께 사선으로 꿰여 벽에 걸려 있다. 죽은 새의 모습이나 장갑의 묘사는 사진만큼이나 정교하고 섬세하다. 특히 중세 기사들이 전투할 때나 사냥할 때 착용했던 벙어리장갑(Chavlier Mitten)에 반사되는 빛을 정확하게 표현함으로써 장갑의 금속성을 절묘하게 부각하였다. 이 빛에 대한 영감은 그 뒤 카라바지오에 의해 계승되어 회화 속에서 빛의 새로운 기능과 표현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죽은 자고새가 종적인 이미지를 구축하였다면 자고새의 몸을 관통했을 화살은 횡적인 이미지를 구성한다. 즉 자고새로 인하여 종적인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작가의 장치로서 화살 그림은 작가의 세심한 장치로 보인다. 그것도 완전한 수평보다는 장갑 쪽으로 약간 쳐진 화살을 묘사하고 다시 철장갑의 표면을 빛으로 강조함으로써 자고새 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장갑 쪽으로 시선을 분산시켜 그림을 보는 관람자에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물화의 역동성은 없지만 삶의 과정과 그 사이로 관통하는 시간의 흐름을 그림으로 표현해 낸 정물화는, 관람자로 하여금 각 정물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끌어내는 동시에, 전체적으로 그림을 통한 사고의 확장을 철학적인 것으로까지 고양시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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