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모습이 더 아름다운 지리산 둘레길

2019년 한 해도 그 꼬리를 감추던 날, 올해 열 번째 초록걸음은 산청을 지나 하동 위태마을에서 시작되었다. 지난 3월 백두대간이 지나는 남원 노치마을에서 시작된 초록걸음은 행정마을 서어나무 숲을 지나고 인월 지나 함양 벽송사와 용유담 거쳐 쌍재와 고동재를 넘어 산청으로 입성, 경호강 따라 걸으며 바람의 마을 성심원도 만났고 단풍으로 물든 백운동계곡 지나 산천재 앞마당에서 천왕봉을 바라보기도 했었다. 그리고는 하동 땅에서 2019년 마지막 초록걸음을 멈추었다.

 

▲ 12월 초록걸음에 함께한 사람들(사진 = 최세현)

위태마을 입구에선 마을 당산나무인 상수리나무가 우릴 반겨주었다. 상수리 당산목은 드문데 이 상수리나무는 그 나이가 자그마치 100세나 되신 어르신으로 해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주민들이 아직도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이 나무 바로 앞에는 6.25전쟁 흔적인 총탄 자욱이 있는 남근석이 서 있는데 원래는 두 개였지만 20년 전쯤에 누군가가 훔쳐 가버려 지금은 하나만 남아있다.

마을을 지날 즈음 둘레길의 명물이 된 견공 두 마리가 우리 걸음에 합류했다. 위태마을 민박집 ‘정돌이민박’에서 키우는 개들인데, 둘레꾼들을 따라 하동읍까지 갔다가도 다시 집으로 잘 찾아오기로 소문이 나 있는 녀석들이다. 그 견공들과 함께라서 아이들은 힘든 줄 모르고 더 신나게 걸을 수 있었다. 이날도 하동호까지 따라왔다가 우리랑 헤어져 집으로 잘 돌아갔다는 후문이... 위태마을을 지나 가파른 깔딱고개인 지네재를 넘으면 오율마을이 나오고 새참사랑방이 있는 궁항마을에 다다르게 된다. 궁항마을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마을의 지형이 활목을 닮아서 붙여진 지명으로 지난봄 둘레길 들꽃 조성 프로젝트 ‘피어라 들꽃마을’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마을회관 2층의 새참사랑방엔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는 주방시설과 함께 라면 등 자율판매대가 비치되어 있어 둘레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 12월 초록걸음에 함께한 사람들(사진 = 최세현)

8년째 이어지고 있는 초록걸음은 12월 마지막 걸음 땐 항상 각자 가져온 반찬들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 전통이 있다. 올해도 변함없이 궁항마을 마을회관에서 다양한 나물에 참기름과 김가루 그리고 달걀후라이 까지 더해진 맛난 비빔밥을 다 함께 나누어 먹었다. 말 그대로 한 식구가 된 시간이었다. 식사 후에는 길동무들과 함께 빔프로젝터로 한 해 동안 걸었던 초록걸음 영상들을 한 장 한 장 되돌아보며 2019년 지리산 둘레길을 가슴에 새기고2020년에도 변함없이 그 길을 뚜벅뚜벅 걷겠다는 다짐을 했다.

 

▲ 산수유꽃(사진 = 최세현)

점심밥을 먹고는 너무 일찍 핀 산수유 꽃의 환송을 받으며 궁항마을을 출발, 낙동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 되는 양이터재로 향했다. 임진왜란 때 양 씨와 이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피난을 들어와 정착하면서 양이터란 지명이 붙여졌는데 아직도 서너 가구가 살고 있다. 양이터에서 양이터재까지는 오르막의 포장된 도로가 계속되기 때문에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중간에 ‘우주사고’란 작품명의 설치미술이 있어 흥미를 제공한다. 2015년 지리산프로젝트란 제목으로 작가들이 둘레길 곳곳에 설치미술 작품들을 전시했는데, 이곳엔 인간들의 난개발로 지형이 바뀌는 바람에 지리산으로 오던 ET가 절개지에 부딪쳐 자전거와 함께 추락했다는 줄거리의 작품이 좀 낡긴 했지만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 ‘우주사고’ 지점을 지나면 금새 양이터재가 나오는데 낙남정맥이 지나는 등산로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빗물이 하동호 쪽으로 흐르면 섬진강 수계가 되고 궁항마을 쪽으로 흐르면 낙동강 수계가 된다.

 

▲ (사진 = 최세현)

이곳 양이터재에서 하동호가 있는 나본마을까지의 대략 3Km 구간은 무척 아름다워서 지리산 둘레길 22개 구간 중 필자가 가장 편애하는 길이기도 하다. 계곡물 소리 들으며 호젓한 오솔길과 대나무 숲길을 걸을 수 있고 또 계속 내리막이기 때문에 아이들이나 노약자도 부담없이 걸을 수 있어 더더욱 강추하는 구간이다. 이 구간을 걷는 동안 길을 보수하고 석축을 다시 쌓은 흔적들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호젓하고 안전한 길이 될 수 있도록 항상 관심을 가지고 관리 중인 (사)숲길 식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사진 = 최세현)

가장 둘레길다운 둘레길이 끝나는 나본마을엔 하동호가 펼쳐져 있다. 청학동 계곡에서 흘러 내려온 물들과 양이터재에서 흘러온 물들이 모여 커다란 호수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하동호 둘레를 한 바퀴 도는 것도 지리산 둘레길 만큼이나 좋을 듯했지만 짧은 겨울낮 때문에 진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이렇게 2019년 한 해 동안 남원에서 시작해 함양 산청 지나 하동까지 즐겁고도 무탈하게 걸어준 길동무들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과 함께 2020년 새해에도 변함없이 둘레길 길 안내를 계곡 이어갈 것을 약속하면서 이성부 시인의 ‘산길에서’라는 시로 올해의 초록걸음을 모두 마무리했다.

 

▲ (사진 = 최세현)

 

산길에서 / 이성부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발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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