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몸에는 물이 70%인데 사람이 가진 것 가운데는 플라스틱이 7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니 플라스틱, 비닐, 스티로폼들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도 있다. 눈으로 먼저 판단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눈은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없다. 더러 눈이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가 하면,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말도 있다. 보기에는 시원찮고 투박해 보여도 보기와는 달리 실속이 있는 경우에 쓰는 말이다.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겉모습에 너무 현혹되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이다. 깔끔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할까? 비닐로 포장된 그런 물건이 꼭 좋다는 보장이 있는가?

▲ 이영균 녹색당원

전통시장과 대형마트가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본다. 전통시장은 자연 그대로 손님을 맞고 있다. 대체로. 대형마트는 그렇지 않다. 받침은 스티로폼이고 비닐(랩)로 덮여있는 게 많다. 군데군데 포장용 비닐봉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우리가 소비하는 플라스틱은 얼마나 될까? 2016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간 98.2㎏의 플라스틱을 소비했다. 그러면 그 해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이 소비한 쌀은 얼마나 될까?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61.9㎏이다. 우리가 소비하는 플라스틱이 쌀보다 많다는 말이다. 얼마나 플라스틱에 길들여져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플라스틱은 자연 상태에서 분해되어 없어지는데 길게는 5백년이 걸린다고 한다. 플라스틱은 ‘1868년 미국 하이엇이 상아로 된 당구공의 대용품으로 발명한 셀룰로이드가 최초’(두산백과)라고 하니, 그때 만든 것도 아직 지구상에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인공적으로 분해할 수도 있고 재활용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에 따른 부작용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는 플라스틱 폐기물은 몇 백 년을 갈지 모른다. 그 사이에도 플라스틱 쓰레기는 쌓이고 쌓인다. 상상을 넘어서 플라스틱이 지구를 덮으면 지구는 ‘플라스틱 행성’이 되고 말 것이다.

<플라스틱 행성>(베르너 보테 감독, 2009)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단다. 이 영화를 통해서 지구를 뒤덮어버린 플라스틱의 적나라한 영향과 폐해를 알게 된 산드라 크라우트바슐은 플라스틱 없는 삶을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책으로 펴냈다. <우리는 플라스틱 없이 살기로 했다>(산드라 크라우트바슐 지음, 류동수 옮김. 양철북 2016)이다. 지은이도 영화를 보기 전에는 주차할 데가 마땅치 않아 짜증이 나고, 시내까지 가는 동안 운전으로 신경질을 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포도주나 한잔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했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는 생각이 180도 돌아선다. 이 책 33쪽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난 이제 이토록 무책임한 산업계와 그들의 광고에 내 자신을 멍청하게 팔아넘기지 않을 거야. 우리가 보는 것이라고는, 언제나 눈부시게 흰 빨래와 위생적으로 포장된 완제품 먹을거리들 앞에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뿐이야. 또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멍청한 짓을 저지르는지도 모르면서 아주 당당하게 그 물건들을 돈을 주고 사지. 자본가들은 새로운 욕구를 끊임없이 일깨우고, 그래야 자기가 생산한 쓰레기를 처분할 수 있으니까 그렇겠지. 반면 그 제품에 어떤 성분이 들어있는지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 포장재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어. 게다가 그런 물건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지천으로 널려있다는 게 더 문제야.”

그러면서 아이들의 페트 물병을 알루미늄 물병으로 바꿔준다. 이런 대화가 이어진다. “플라스틱 병에 든 물을 마시면 어차피 물맛도 별로 좋지 않아요.” 아이들도 맞장구를 친다. “플라스틱이나 비닐포장이 없는 걸로 사서 쓸 작정이야.” “그럼 언제부터 시작해요?”“오늘, 지금 당장!” 그 가족의 앞길이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뜻을 굽히지 않는다.

조물주는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플라스틱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다. 조물주가 만든 인간이 조물주-있는지 없는지 따질 일은 아니다-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플라스틱이 인간을 어떻게 할지는 조금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다.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만큼, 그 편리함이 차곡차곡 쌓였다가 언젠가는 감당하지 못할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다. 바다로 흘러든 플라스틱이 죽은 물고기 몸에서 나오고 있다. 깊은 바다 속에 있는 산호초가 빛을 잃고 죽어가고 있다.(다큐멘터리 영화 <산호초를 따라서(Chasing Coroal)>에서 확인할 수 있다.) 농사에 ‘유용한’ 플라스틱은 극히 잘게 부서져서 미세플라스틱이 되고, 그것은 사람 몸속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이제 플라스틱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을 때가 됐다. 하루아침에 플라스틱과 결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녹색평론> 168호(2019년 9-10월)에 실려 있는 농부작가 최용탁의 ‘플라스틱 홍수 속에서’에 있는 글 한 대목을 옮겨본다.

이제는 주위에서 플라스틱 아닌 것을 찾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플라스틱은 조물주가 미처 만들지 못한 물질을 인간이 만들어 신의 실수를 만회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통계를 해석하거나 분석할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지만 어떤 수치는 즉자적으로 공포를 불러온다는 것을 안다. 플라스틱이 생산된 이래 작년 기준으로 83억t 정도가 생산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플라스틱이 분해되기까지 300년 정도가 걸린다고 하니 인간이 만들어낸 그것들은 현재의 인류가 자연사할 때까지 건재할 것이다. 이 수치는 낯설고 두렵다. 어떤 느낌인가 하면 플라스틱이라는 변형되기 쉬운 어떤 것이 인류를 변형시키는 중이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고나 할까. 전혀 관련 없는, 성형수술을 의미하는 영어 ‘plastic surgery'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드는 착각, 그러니까 플라스틱이 인류를 어떤 다른 존재로 변화시키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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