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도와 학자를 구분하자.

학도(學徒)는 무엇을 이루려 공부하는 사람이다. 학자(學者)는 일정한 단계를 이룬 뒤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아울러 그 길을 일관되게 가는 사람이다. 학도와 학자를 같은 뜻으로 쓰는 사람도 있다. 겸손한 사람은 학도라며 자신을 낮추고 자신 있는 사람은 자신을 학자라 칭하며 은연중 자신을 학도와 구분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두 단어가 같은 뜻이라는 데에 통시적으로는 나도 동의한다. 서두에 설명이 이처럼 늘어지는 건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학도와 학자를 구분하는 방식이 유효할 듯싶어서이다. 오늘의 결론을 미리 말하자. 학도와 학자는 구분돼야 한다.

▲ 박흥준 상임고문

일반적인 해석을 일단 따르자. 학자는 대학의 선택을 받은 사람만 될 수 있다. 대학의 선택은 받지 못했지만 그에 버금가는 학문의 경지를 이룬 사람에게는 재야학자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학도 역시 대학이 필요하다. 일단 대학생이 돼야만 학도라 칭한다. 대학이 취업을 준비하는 기관으로 전락해 기업의 파이(빵)를 보장하는 데 급급한 근래의 상황은 그것마저도 힘들게 하고 있지만. 어쨌든 학도와 학자를 구분하자.

정씨 성을 가진 어떤 분을 나는 잘 모른다. 일면식도 없다.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단지 그 분이 영문학자의 지위를 가진 것만 요즘 들어 매체를 통해 안다. 영문학에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어느 분야의 전문가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학자라는 지위는 아무나 따낼 수 없는 것이기에 그 분이 그 지위에 오를 때까지 공부에 바친 시간과 열정에 일정 수준의 인정을 할 용의는 있다. 그 이상은 아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 분의 최근 행적이 내가 생각해 온 학자의 행적과 사뭇 다른 까닭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 그 분은 재테크의 귀재였다. 투 잡이 가능한 능력을 지녔다. 남편이 공직에 나아가기 전까지는 주식투자를 했고 공직자가 된 뒤에는 욕심을 버리지 못 하고 재산을 계속 일구려 간접투자로 바꿨는데 그게 과연 간접투자인지 아닌지가 수개월째 논란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그 분은 학자가 아니다. 학도까지는 될지언정. 내가 이해하는 한, 학자는 일단 가난하다. 학문이라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학문을 닦으며 투자를 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다. 둘 가운데 하나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학자는 자신의 전공학문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문외한이기 십상이다. 학문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영어 나부랭이(?)는 열심히 쓰고 외우고 발음하면 인고의 시간이 지난 뒤 웬만한 수준에 오를 수 있다. 그것도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영문학은 다르다. 영미권의 문학을 공부하는 게 영문학인데 문학은 여러 갈래이고 개별 문학은 개개의 역사성이 있고 당대의 사회상황과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을 고찰하지 않으면 가장 기초적인 의미에서 문학을 아예 알 수조차 없다. 고전문학과 근대문학, 현대문학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교양학부 교수조차 하기 힘들다. 따라서 학자들은 시간을 아껴가며 밤새워 끊임없이 공부한다. 방대한 서적의 숲에 잠겨 나이를 하염없이 먹어야 한다. 교양과목 하나 가르치기 위해 촘촘히 짜인 강의계획서를 내야하고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학생들을 위해 눈높이 교수법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한다.

문학은 그렇다 치고 어학은 어떠한가. 소쉬르에 질리고, 로만 야콥슨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구조주의와 변형생성문법에서는 나의 천박함과 아둔한 머리에 절규하고, 비교언어학은 이름만 들어보는 데 그친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일찌감치 어학을 포기했다. 아. 참. 노엄 촘스키를 5-60년대 옛날의 언어학자로 알았던 나였으니, 지금도 살아계시면서 당대의 지성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걸 최근에야 알게 된 나였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 하랴. 나를 기준으로 했을 때 어학은 천재의 영역이다. 문학 이상으로 어학 역시 어렵다.

이렇게 봤을 때 정씨 성을 가진 어떤 분은 학자라는 사회적 지위를 지금이라도 포기해야 한다. 학위를 받기 전까지 학도로 열심히 살았더라도, 그 결과로 어느 순간 학자가 되었더라도 지금은 학자가 절대 아니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 땅의 학문과 이 땅의 학자들이 존심 상하지 않고 제 길을 갈 수 있다. 공부에만 매진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게 학문의 세계이다. 그런데 투자도 하고 공부도 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별도의 경제활동을 하며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은 학자여서는 안 된다. 먹을 게 없어 편의점 알바를 하는 저 수많은 비정규 교수들은 제외하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학자로 계속 남으려는 한 그 분 여생은 힘들어진다. 일정한 대가를 치른 뒤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반추해 자본시장법에 걸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투자가 아닌 그냥 투기나 틈틈이 하며 맛있는 거 골라먹고 해외여행이나 수시로 즐기며 사는 게 그 분을 위한 길이 아닐까.

지난 90년대 북녘에서 벌어졌던 희대의 ‘충성의 편지 이어달리기’가 21세기도 한참 지난 오늘 남녘에서 ‘교수님께 손편지 보내기’로 이름만 약간 바꾸어 다시 전개되고 있다. “교수님.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이러고도 우리가, 우리의 정신이, 우리 사회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퇴보하는 게 아닐까.

그 분을 남편의 전정(前程)을 그르친 못된 아내로 치부하는 데 나는 단연코 반대한다. 남편과 아내가 경제공동체인 한, 설령 남편이 몰랐다 하더라도 남편 역시 아내의 결정과 그에 따른 행위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아울러 정치바람에 휩쓸린 ‘가련한’(?) 희생양이라는 시각도 나는 거부한다. 그 분은 결코 가련하지 않은 거액의 자산가이며 지금까지 드러난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그 분의 행동에 불법과 위법, 탈법 등등의 혐의가 짙기 때문이다.

학자이면서 자산가인 사람? 자고로 드물다. 성경에 나와 있다.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는 것보다 어려운 게 학자이면서 자산가로 활동하는 일이다. 자본시장도 매우 복잡해져 첨단학문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며 학교행정에 교수학습에 얼라들 취업지도와 취업알선에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 세상이 대학에 펼쳐진 지 오래이다. 따라서 그 분은 학자가 아니다. 기껏해야 한 때의 학도에 머물 수는 있었겠지만. 학도와 학자를 구분하자. 손편지 보내기? 하지 말자.

* 이 글은 지난 11일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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