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어둑해진 아파트 앞 길가에 탑차 한 대가 뒷문을 열어제낀 채 서있다. 그 옆에는 뿔테안경을 쓴 깡마른 체격의 오십대 초중반의 아저씨가 허리를 숙이고 박스더미들을 정리하고 있다. 한 손으로는 연신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서도 다른 한손으로 바쁘게 물건들을 분류한다. 짐을 나르다가 전화를 받고는 ‘감사합니다’와 ‘죄송합니다’를 연발한다. 길고 무더웠던 지난 여름 내내 아저씨는 땀에 젖은 런닝셔츠를 걸친 채 같은 모습으로 일을 했다.

운전을 하다 보면 무리하게 차 앞으로 끼어들어 곡예하듯 달리는 오토바이를 만날 때가 종종 있다. 간신히 브레이크를 밟아 사고를 면하면 입에서는 금세 욕이 튀어나오지만, 그 소리를 들을 틈도 없이 오토바이는 중앙선을 밟고 아슬아슬 차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꽁무니에 ‘생각대로’라고 적힌 트렁크를 단 그들은 스마트폰 앱으로 배달 주문을 받아 물건이나 음식을 나르는 퀵서비스 노동자들이다.

▲ 서성룡 편집장

‘아이 학교 보내고 택배 돌려요... 공연 없는 날 타다 몰아요’

지난달 <조선일보>가 ‘혁신이 낳은 새 일자리들’이란 소제목으로 실은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는 정보통신 기술과 스마트폰이 결합해 탄생한 ‘플랫폼 노동’이 짭짤한 부수입원이 되고 있다고 찬양한다. 기사에 등장하는 주부는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남은 시간에 택배 물량을 받아 배송하는 일을 한다고 하고,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한 연극인은 공연이 없는 날 ‘타다’를 몰아 수입을 보충한다고 소개한다.

하지만 기사는 이러한 플랫폼 노동이 일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는 사실, 동종 노동자들의 일자리 안정을 무너뜨리고, 결국 거리로 내모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비추지 않는다.

‘최첨단’이라는 정보통신 기술과 스마트폰,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합작으로 제조해 낸 택배노동, 퀵서비스 노동, 아르바이트로 돌아가는 ‘타다’서비스 노동이 이른바 ‘플랫폼 노동’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아 생활하지만, ‘노동법’이라는 최소한의 안정장치마저 보호해주지 않는다.

첨단 기술은 인간을 어렵고 위험하고 더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능력도 있지만, 거꾸로 인간을 더 큰 위험에 노출시키고, 더 정교하게 노동을 통제하고, 더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도록 강제한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이러한 플랫폼 노동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3년 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자고 모인 천만 촛불은 단순히 박근혜 한 사람을 끌어내리기 위한 움직임이 아니었다. ‘아차’ 하는 순간 딛고선 바닥이 무너져 아무런 안전장치 없는 불안한 일자리로, 거리로 내몰려야 하는 현실. 서로가 서로의 노동을 갉아먹고, 끝없이 노동자의 생명을 갈아넣어야 움직이는 괴물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체제라는 수레바퀴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사는 것이 부끄러울 만큼 무능했고, 부패했던 박근혜 정부는 300명이 넘는 생명을 구하지 않고 수장시켰다. 그에 대한 분노로 시작된 촛불이 전국을 태워 마침내 임기 중인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스스로 ‘촛불 정부’라 일컫는 문재인 시대를 열었다. 촛불에 기름을 부운 것은 이른바 ‘정유라 사건’으로 불리는 현대판 ‘음서제도’에 대한 전국민적인 분노였다.

고 노회찬 의원은 “혼자 꾸는 꿈은 꿈일 뿐이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로 탄핵 이후 사회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라는 약속은 추위 속에서 촛불을 들었던 이들의 가슴을 희망으로 채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3년여가 흐른 지금, 촛불 든 사람들이 함께 꾸었던 ‘나라다운 나라’라는 꿈은 아직 요원하다. 정권 교체는 이루어졌지만, ‘인종이나 성별, 학력이나 직업, 종교로 인해 차별 받지 않고, 누구나 노력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는 지금도 매일 배반당하고 있다.

가난한 노인들은 오늘도 여전히 박스를 줍고 있고, 노동자들은 간접고용과 외주화로 오늘도 고통 받는다. 노조 활동을 이유로 삼성으로부터 해고된 김용희는 150일 넘게 철탑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다. 외주화와 해고문제로 6년간 법정싸움을 벌여온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마침내 대법원으로부터 직접고용 판결을 받고도 복직되지 못한 채 차가운 도로 위에서 오체투지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이러한 플랫폼 노동에 대해 ‘노동자 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 ‘공유경제’라는 허울로 시작된 우리나라의 ‘타다’ 서비스도 플랫폼 기업이 서비스 평가를 통한 지휘 감독권을 행사하고, 징계와 인사권을 가진다는 점에서 사실상 사용자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지난달 1일 장병규 4차산업혁명 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플랫폼 노동자 확대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며, ‘주52시간을 맞추는 법안 자체가 현실과 맞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신은 젊을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주 100시간을 일했다고 자랑했다.

주52시간 노동제라는 OECD 최장 노동시간마저도 “기업에게 부담되니 유예해야 한다”는 중소기업벤처부 장관의 언설. 불법과 편법 동원해 국민연금에 막대한 손해를 끼치고 권력 승계한 소송 중인 범죄자 앞에서 감사하다고 말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최신 정보통신기술(IT)과 인공지능(AI)의 결합으로 펼쳐진다는 4차산업 혁명이란 결국, 우리사회 꼬리칸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야 돌아갈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된다. 마치 영화 ‘설국열차’에서 무한궤도를 도는 첨단 열차의 엔진이 작동하는 비밀이 결국, 비좁은 기계 틈바구니 안에서 하루 종일 착취되고 있는 아동노동이라는 설정을 눈앞에 실사로 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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