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경제질서 상상을 위한 실마리들

[편집자 주] 이 글은 지난 2일 서울 인사동 마루갤러리에서 열린『시민포럼 2019, 다음 100년, 새로운 상상. 지평을 그리다』에서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불평등 문제와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기본소득 제도의 한계 등에 관해 논했다. 김 교수의 양해를 구해 2부에 걸쳐 당시 발표문을 싣는다.

관련기사 : “불평등에서 경제민주주의로, 그리고 소유권의 재편으로”[1]

 

▲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낡고도 새로운 문제틀: 불평등에서 경제민주주의로

앞의 논의가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또는 도입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준-)기본소득들의 의의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오늘날 삶의 재생산의 위기에 처한 대중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며, 또한 그 자체로 힘 있는 자들에 대항한 투쟁에서 얻어낸 소중한 산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의 메커니즘에 보다 긴밀하게 맞물려 있는 대안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지금까지 시사된 대로 경제의 전반적인 문제를 아우르는 대안이 제출되지 못하는 것은 애초 현실을 불평등이라는 부족한 틀로 이해하고 해석한 것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경제문제의 복합성과 다차원성을 복원하기 위해 이를 대체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좋을까? 이 글에서는 경제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를 제안한다.

지난 2012년 제18대 대통령선거 전후로 ‘경제민주주의’라는 화두가 우리 사회에서 급부상했다. 이 의제는 범진보진영은 물론 중도우파까지도 흡수하는 위력을 보이면서 일종의 ‘시대정신’으로 떠올랐다. 모든 정치세력들이 자신이야말로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기에 적임이라고 소리를 높였고, 마침내 이 화두를 ‘선점’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경제민주주의가 정확히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전부터 해석이 분분했다. 한편으로 박근혜정부는 출범 초 발표한 140개의 국정과제 중 경제적 약자의 권익보호, 소비자 권익보호, 실질적 피해구제를 위한 공정거래법 집행체계 개선, 대기업집단 지배주주의 사익편취행위 근절, 기업지배구조 개선, 금융서비스의 공정경쟁 기반 구축 등 6개의 과제를 경제민주주의의 범주 아래 둠으로써 경제민주주의의 의미와 내용을 규정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선거를 통한 각축과정에서 각 진영의 정치인은 물론 여러 분야의 학자・활동가에 의해 경제민주주의는 다양하게 규정되었고 그 내용도 다채롭게 채워지고 있었다.

요란한 출범과 달리 박근혜 대통령 집권기 내내 경제민주주의의 내용과 의의는 축소 일변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2012년 선거에서 박근혜 캠프에서 경제민주주의 공약 수립에 기여했던 김종인이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 ‘사령탑’을 맡으면서 경제민주주의가 다시 탄력을 받는 듯했다. 선거에서 뜻밖의 압승을 거둔 뒤, 당시 민주당 대표였던 김종인은 여야 의원 121명의 지원을 받아 상법개정안(의안번호 2000645)을 발의했다. 여기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집중투표제 의무화, 사외이사 독립성 강화 등이 포함되었다. 말하자면 김종인은 재벌 내부의 지배구조와 의사결정구조를 바로잡는 데서 경제민주주의의 단초를 잡아낸 셈이다. 그러나 이후 대선 국면에서 김종인은 당을 나갔고, 결과적으로 경제민주주의 논의는 사그라졌다.

이상의 사태를 통해서 보면, 우리 사회에서 경제민주주의는 최근 몇 년의 선거에서 쓰다 버린 구호 같은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경제민주주의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만 않았을 뿐 우리나라에서만 해도 그 논의의 역사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남운의 ‘민주경제’, 조소앙의 ‘삼균주의’,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등이 모두 경제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이념적 자원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러한 성과가 제헌헌법에 이미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그러므로 1987년에 개정된 헌법에 ‘경제민주화’ 조항의 명문화는 어떤 ‘출발점’이라기보다는 오랜 역사적 과정의 잠정 결론이라고 하는 게 옳다.

시야를 나라 바깥으로 돌리면, 경제민주주의 개념을 가장 처음으로 명시적·종합적으로 다룬 저작은 1928년 독일에서 나온 나프탈리(Fritz Naphtali)의 ‘경제민주주의: 그 본질, 방법, 목표’(Wirtschaftsdemokratie: Ihr Wesen, Weg und Ziel)일 것이다. 본래 이 책은 이 해에 열린 독일 자유노조의 총회에 토의자료로 제출된 것으로, 이전 10여년 동안 이어진 경제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를 집대성하고 있다. 그런 만큼 이 경제민주주의 개념은 당대 독일의 담론과 실천운동 지형을 반영하는데, 무엇보다 그것은 로자 룩셈부르크 류의 급진적 혁명론보다는 베른슈타인이나 힐퍼딩 식의 수정주의에 입각해 있었다.

바이마르공화국(1919~33년)에서 재무장관까지 지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힐퍼딩(Rudolf Hilferding)은 독일식 경제민주주의론의 선구자로 꼽힌다. 그는 당대 자본주의에서 대규모 독점체, 특히 거대은행과 거대기업의 융합체인 금융자본(Finanzkapital)이 경제 전체를 지배하는 현상이 일반화하고 있다고 보고, 이를 근거로 자본주의 자체가 이전의 자유경쟁적 형태에서 탈피해 ‘조직된 자본주의’로 이행했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조직화는 생산의 사회적 성격을 극대화시키지만 여전히 소유는 사적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곧장 자본주의 극복의 전망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경제의 조직화 과정은 곧 경제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여지를 만들어 내고, 이는 곧 생산에 대한 대중의 통제로 나아간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자본주의가 조직 자본주의라는 최고 단계에 이르렀을 때 경제민주주의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고, 경제의 민주화란 곧 사회주의로의 온건한 이행을 의미한다는 것이 당시 수정주의 진영의 일반적인 이해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발달한 경제민주주의 개념은 무엇보다도 경제의 민주적 통제를 가리켰다. 독일 사민당과 자유노조 안팎의 논의를 총괄하면서 나프탈리는 경제민주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경제민주주의란 한편으로 일종의 민주주의, 즉 정치적 민주주의와 구별되고 또 그것을 보완하는 경제적인 민주주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의 경제적 상태, 곧 경제적 독재체제와 구별되고 또 그에 반대되는 경제의 민주적 상태이다. 정치적 민주주의 비판은, 정치적 민주주의만으로는 완전한 민주주의가 못 되고 노동대중의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지도 않는다는 것, 그것으로는 가장 끔찍한 형태의 착취조차도 철폐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정치적 민주주의의 부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대로……경제민주주의 노선으로의 발전을 위하여 정치적 민주주의는 필요불가결한 출발점이자 전제조건이다.

- Naphtali, Wirtschaftsdemokratie: Ihr Wesen, Weg und Ziel, 1928, S. 14. -

요컨대 경제민주주의란 ‘경제관계의 민주화를 통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장’으로서, 자본주의의 ‘경제적 독재체제(Autokratie)’가 극단화된 현대 독점자본주의 하에서 가장 절실하게 제기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민주주의의 실현 과정, 곧 경제관계를 민주화하는 과정이 ‘경제민주화’다. 나프탈리는 경제민주화의 내용을, 경제자치체·공기업·소비자단체·농업 등을 중심으로 한 경제 자체의 민주화와 노동관계의 민주화, 교육제도의 민주화 등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기업은 물론 지방 및 중앙의 행정단위에서도 노동자들의 참여를 증진시킨다는 기획이 바로 경제민주화다.

이 글에서 경제민주주의의 역사를 모두 살펴볼 수는 없다. 다만, 독일에서 경제민주주의 개념이 명시적으로 발달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이미 독일보다 앞서 자본주의적 관계가 발달한 영국이나 프랑스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은 밝혀둔다.

소유권의 재고찰: 경제민주주의의 핵심

사실 2012년 대선 즈음에 경제민주주의 논의가 국내에서 분출되었을 때, 그것은 세계적으로 보아 꽤 특이한 현상이었다. 당시 경제민주주의를 반대하던 보수 논자들은 중에는 이를 경제학에서 학문적으로 확립되지도 않은, 그저 ‘대선용 정치 용어’일 뿐이라고 폄하할 정도였다. 경제민주화 개념은 오직 독일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고향에서 아주 간단한 제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는 경제민주화가 우리나라에서는 온갖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며 탄식하는 논자도 있었다. 실제 이들 말대로, 대선 이후 경제민주주의 논의는 빠르게 잦아들어갔고 이러한 분위기는 현 정부 들어서도 크게 바뀌지 않고 있다. 바로 이렇게 경제민주주의가 빠져나간 자리를 이 글 서두에 언급했던 불평등 문제틀이 빠르게 채워나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경제민주주의가 사라져가던 바로 그 기간에, 나라 밖에서는 정반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2007~08년 금융위기 이후의 ‘월가를 점령하라’ 류의 거리의 운동이 꽤 잘 조직된 제도권 정치운동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99퍼센트다’라는 구호로 요약되는 불평등 문제틀이 경제민주주의라고 요약될 수 있는 체계적인 정책집합의 꼴을 갖춰나갔다. 이에 대한 가장 모범적인 예를 대서양 양안의 두 전통의 강대국 영국과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양국의 주류 정치권에서 모처럼 ‘사회주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두 세력, 즉 2015년부터 영국 노동당의 당수를 맡고 있는 제러미 코빈과 2016년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른 뒤 식지 않는 인기를 과시하고 있는 버니 샌더스가 그 장본인이다. 최근 들어 이들의 경제정책에서 ‘경제민주주의’라는 구절이 점점 자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들이 경제민주주의를 주창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일리가 있다. 이 둘이 공통적으로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민주사회주의는 소비에트식 국가 사회주의와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1950년대 이후 발달한 일종의 ‘제3의 길’ 운동이었다. 경제민주주의는 바로 이 민주사회주의와 역사적으로 친연성을 가져왔다.

길게는 비어트리스/시드니 웹 부부의 󰡔산업민주주의󰡕가 출간된 19세기 말부터 발달해오면서 경제민주주의 개념은 여러 세부 내용을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두를 꿰뚫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면 그것은 (당연하게도) 민주주의일 것이다. 이 민주주의란 한편으로는 경제과정에서 개인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고 오히려 증진한다는 대원칙과도 관련이 있겠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점화된 현대 자본주의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대기업의 횡포를 어떻게 제어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후자와 관련, 민주사회주의가 표방하는 경제민주주의란 경제 전반에 대한 민주적 통제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경제에 대한, 특히 독점 대기업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사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의 진보진영이 직면한 가장 핵심적이고도 골치 아픈 문제, 그러나 거의 아무런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문제일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무기력함에 빠지게 된 것은 우리가 ‘불평등’이라는 틀로 경제 문제를 파악하고 있는 것과도 무관치 않으리라. 반대로, 코빈과 샌더스─특히 전자─는 경제와 기업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문제를 소유권의 재구성이라는 ‘정공법’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 좋았던 시절에 국가 소유였다가 신자유주의 시기에 민영화된 기업들의 재국유화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재국유화를 하더라도 과거와 똑같은 관료적이고 낭비적인 방식이 아니라 경제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의 수립과 집행, 사회기반시설·의료제도·교육제도의 현대화, 기후변화와 같은 새로운 목표의 추구 등이 그 운영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협동조합적 소유나 지역적 소유 같은 새로운 대안적 소유형태도 증진될 것이며, 오늘날의 새로운 기술적 조건 아래서 기존의 소유형식들이 노정하는 균열점들을 드러내고 또 그 자리에 대안적인 소유형식을 적용하는 것도 저들이 내세우는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이것은 기존 소유제도의 결과들 위에서 부분적인 조정을 꾀하는 불평등 내지는 재분배 문제의식과는 완전히 결을 달리 하는 문제틀이다.

소유권의 재구성에서 핵심 주체는 국가일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 같은 ‘제3지대’의 존재도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그 의의는 ‘촉매제’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 기존에 민영화된 핵심 기간산업의 재국유화를 포함한 국가에 의한 소유가 가장 기본적인 형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이것은 서유럽 좌파들에게 좋았던 옛 시절(대체로 1950~70년대)로의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그간에 이루어진 시행착오로부터의 학습, 기술 및 시민역량 면에서의 발전 등의 총체적 결과로서 국가역량의 향상을 반영하여 이루어질 일이다. 다른 한편, 직접적인 소유가 아니더라도, 국가는 다양한 형태로 경제에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의 재생산이 국가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고, 덕분에 국가의 영향력도 커지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의료산업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대다수의 의료서비스는 국민건강보험 제도를 통하여 최종소비자인 국민들에게 전달된다. 의료서비스의 생산과 공급은 민간의 주체(주로 대기업과 부유한 자영사업자)가 도맡지만, 국가는 이들에게 일종의 ‘수요독점자’로 나타나기 때문에 개별 소비자가 행사할 수 없는 통제력을 저 대기업과 기득권층에 행사할 수 있으며, 이러한 통제는 소유권에 대한 상당한 제한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가 그러한 통제력을 가졌음을 시민 스스로 깨닫고 그러한 힘을 실제로 행사하는 것이다.

방금 전 보건의료산업의 예에서 암시된 것처럼 상품의 가격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 등의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인민의 의사를 모아내고 이를 입법 등을 통해 실현해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정가에서 버니 샌더스의 약진을 가능케 한 분위기는 동시에 엘리자베스 워런이라는 또 하나의 ‘스타 정치인’을 낳았다. 워런은 비록 사회주의자를 자임하지는 않지만 그가 지난해 내놓은 ‘책임 있는 자본주의법’(Accountable Capitalism Act)은 경영자 보수 제한, 노동자 경영 참여 조항과 더불어 일정 규모(연간 총수입 10억 달러) 이상의 법인기업은 연방법인 인가를 별도로 받아야 한다는 내용까지 들어가 있다. “특히 연방법인은 정관의 목적조항에 주주의 재무적 이해뿐 아니라, 해당 기업과 계열사 및 협력업체 노동자, 소비자, 지역공동체 등 ‘전반적인 공공의 이익’(이해관계자)을 위해 활동한다는 내용을 명시해야 한다.” 이것은 기업의 소유와 운영에 대한 상당한 제한이다. ‘뼛속 깊이 자본주의자’를 자임하는 워런이 ‘책임 있는 자본주의법’ 같은 의제를 내놓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소유권의 재구성이 현대 경제의 거스를 수 없는 힘의 작용 결과임은 이 발전과정의 최첨단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다. 이를테면 ‘플랫폼’ 연구자 닉 서니세크(Nick Srnicek)는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 기업은 경제학에서 자연독점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성격이 있기 때문에 공공적 통제 아래 두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모바일 기술은 또 어떤가? 이 기술적 성취를 토대로 인간의 삶의 차원이 크게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모바일 네트워크 정도는 일종의 ‘공공재’로 제공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기술이 일반화된 지난 10~15년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대기업들의 알량한 돈벌이 및 자기들끼리의 경쟁 논리에 눌려 모바일 기술의 잠재력이 크게 제한되고 있지 않은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손에 쥔 개인용 기기로 하는 일이 고작 온라인 게임이나 유튜브 시청이라는 것은, 저 기술을 가지고 현재까지 인류가 개발해낸 돈벌이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를 나타낼 뿐이다. 사적소유의 굴레에서 해방시켜야만 모바일 기술의 잠재력은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맺음말

이쯤 되면 오늘날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을 사적인 소유권의 제한 또는 대안적 소유제도의 창출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걱정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소유권의 재구성만큼 과감한 해법이 있겠는가? 이 지구의 ‘주요’ 지역에서 소유권에 대한 문제제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는 것은 우리 진보진영에게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데서 경제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도 움틀 것이다.

다른 많은 시민적 권리와 마찬가지로 소유권도 그저 ‘선언’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행사되었을 때 진정한 의미가 산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공적 소유권은 적절히 행사되고 있는가? 형식상으론 (부분) 민영화되었으나 여전히 정부가 상당한 지분을 가진 기업들, 그리고 국민연금기금 등을 통해 정부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민간기업들─우리 정부는 이들에 대해 어떤 공적인 책무를 지도록 강제하고 있는가? 우리는 도로에 주차되어 심각한 교통정체를 야기하는 차량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이는 사익 추구를 위해 공적 소유권이 침해되는 명백한 사례인데, 우리 정부는 여기에 적절한 규제를 가하고 있는가? 정부도 정부지만, 우리나라에선 시민 자신들도 이러한 질문들에 매우 둔감한 게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확보된 공적 소유권을 재천명하고, 그럼으로써 ‘공공성’을 재구축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과정의 출발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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