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경제질서 상상을 위한 실마리들

[편집자 주] 이 글은 지난 2일 서울 인사동 마루갤러리에서 열린『시민포럼 2019, 다음 100년, 새로운 상상. 지평을 그리다』에서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가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불평등 문제와 이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되는 기본소득 제도의 한계 등에 관해 논했다. 김 교수의 양해를 구해 2부에 걸쳐 당시 발표문을 싣는다.

▲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불평등’이라는 문제틀

경제적인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순적 성격은 ‘불평등’이라는 한 단어로 흔히 요약되는 것 같다. 주류, 비주류 할 것 없이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불평등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으니 말이다. 소득 상위 10퍼센트에 속하는 사람들이 전체 국민소득의 절반을 가져간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자본주의 발전이 더디고 민주주의가 취약한 이른바 ‘저개발국’ 얘기가 아니다.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격차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미국과 캐나다에서 1980년부터 2016년에 이르는 36년 동안 1인당 소득의 실질증가율이 63퍼센트였는데, 이를 소득수준별로 나눠 살펴보면, 하위 50퍼센트의 실질소득은 고작 5퍼센트 늘어난 데 반해 상위 1퍼센트의 소득은 206퍼센트 증가했다. 범위를 좁혀 0.001퍼센트에 속하는 소수의 부자들을 보자. 이들의 실질소득은 무려 629퍼센트 불어났다. 새로 생겨난 부의 대부분을 기존 부자들이 가져가니 격차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불평등은 특히 1980년대 이후 급격히 커졌는데, 그 원인으로 많은 경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요인이 기술진보와 세계화다. 기술진보에 따라 거기에 적응하는 이들은 보상을 받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은 도태된다. 또한 자본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그러한 기술을, 그리고 새롭고 ‘효율적인’ 경영기법을 적용하기에 최적의 장소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낡은 기술에 길들여져 있고 상대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선진국’의 노동자들은 점차 쇠퇴하는 반면 중국 등 ‘신흥국’의 노동자들이 약진했다. 물론 이들 모두를 저 창공 위에서 내려다보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그것은 신기술 개발과 그 세계적 적용을 선도하는 글로벌 대기업이다.

이러한 격차는 앞으로 더 커질 전망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AI)과 모바일 기술 등을 결합함으로써 열리게 될 생산의 새로운 장을 일컫는다.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규정하든, 그것이 기존의 세계화를 보다 심화하고 기술진보의 과실을 보다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데 기여하리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4차 산업혁명은 기계에 의한 인간 노동의 대체를 한층 더 촉진할 것이며, 대체되지는 않더라도 생산에서 인간 노동의 지위는 크게 강등될 공산이 크다.

학자들과 정치인들이 불평등 심화를 걱정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사상 최고 수준으로 커져서만은 아니다. 불평등 심화가 우리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저 경제의 효율성과 성장을 해친다. 이는, 보통 경제학자들에겐 불평등이 경제의 성장과 효율적 작동의 불가피한 부산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음을 떠올리면, 커다란 인식의 진전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불평등 심화에 따라 정치적 민주주의까지 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고 있다. 불평등 심화에 따라 ‘금력’이 곧 권력이 되기도 하거니와, 이에 따라 정치과정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커지면 ‘1원 1표’라는 금권주의는 더욱 공고해질 것이다.


불평등 문제틀의 불충분함

위에서 묘사한 대로, 분명 ‘불평등’은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가 처한 곤경을 그 무엇보다 명징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중을 동원해내는 데도 효과적임을 입증하고 있는 개념이다. 또한 그 해법─재분배─도 매우 직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그 덕분인지, 당분간은 적어도 주요 선진국의 정치 일정이 불평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흘러가리라는 전망이 심심치 않게 제기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담론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신자유주의 기간 내내 경제성장, 생산성 향상, 국가경쟁력 강화 등과 같은 우파의 언어에 눌려 고전을 면치 못했던 좌파에게 단숨에 역전의 기회를 안겨준 것도 불평등이었다.

그런데 과연 불평등이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담아내기에 적합한 개념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불평등이란 무엇인가? 주지하듯이 불평등에는 다양한 측면과 차원이 있다. 소득, 자산, 그밖에 각종 자원,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기회, 건강이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심지어 자유에 있어서도 우리는 불평등을 경험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국적, 성, 학력, 고용형태, 직종, 출신지역, 외모, 종교, 성적 지향 등을 근거로 한 다양한 불평등들이 한국 사회엔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흔히 불평등이라고 할 때 우리가 이 다양한 불평등들을 모두 일컫지는 않는다. 보통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불평등은 소득 불평등이다. 그런데 소득 불평등은 불평등의 한 측면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불평등은 결국 소득의 불평등으로 환원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부’의 불평등에 대해 말하지만, 부라는 것은 ‘소득을 낳는 능력’이라는 점에서만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다. 비정규직이나 여성에 대한 차별은 이들의 임금이 각각 정규직과 남성의 그것에 비해 68.3퍼센트와 66.6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사실로 곧잘 환원되곤 한다(2018년 기준). 심지어 건강이나 지능 같이 상당 정도 타고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속성까지도 소득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소득 불평등이 다른 모든 불평등들을 대표한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다양한 불평등들을 소득 불평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개념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보다 구체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예를 들어보자. 법률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은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이 가장 극심한 영역 가운데 하나다. 당연히 돈이 많으면 좋은 변호사를 구할 수 있겠지만, 좋은 관계─이른바 ‘사회적 자본’─를 가진 사람은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양질의 법적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화폐화된 소득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불균등하게 배분된 이러한 ‘관계’의 가치를 돈으로 환원하면 어떨까? 분명 그것은 같은 변호사를 유료로 고용할 때의 비용보다는 훨씬 높아야 할 것이다. 이 맥락에서 화폐적 환산은 유용한 방식인가? 한편 이러한 난점은 주어진 불평등에 대한 모종의 ‘해법’을 강구할 때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법률 서비스에의 총체적 접근권의 불평등을 소득의 차원으로 환원한다면, 그 해법도 소득의 차원에서 구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이 적절한가? 아니, 가능하기라도 할까? 차라리 국선변호사 제도 활성화 등을 통해 법률 서비스의 공공성을 높이는 게 비용 면에서나 효과 면에서나 낫지 않겠는가? 비슷한 논리로, 고용시장이나 노동현장에서 성별 불평등도 결코 임금수준의 격차로만 환원될 수는 없는 것이고, 사실 그러한 불평등의 해소는 경제의 영역을 거뜬하게 벗어나는 문제다.

둘째, 이렇게 다양한 차원의 불평등들이 모두 ‘경제’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정작 경제 영역 내에도 불평등이라는 개념으로는 온전히 포착하기 까다로운 모순들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불평등 문제틀은 다양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담아내는 데 실패하거나 아예 건드리지조차 못하기도 한다. ‘불평등’이 포착하는 데 실패하는 대표적인 문제가 국내에선 재벌, 보다 일반적으로는 독점자본과 관련된 것이다. 다른 예로, 마르크스주의에서 강조하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모순도 그저 소득분배상의 불평등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불평등’이라는 프리즘으로 사태를 파악하는 순간, 노동자-자본가 간의 모순은 단순히 양자 사이의 소득격차의 문제로 환원되고, 그것은 노동자 계급 내부의 소득격차와 질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갖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요컨대 불평등이란 그것이 관여하는 고유의 영역이 있는 문제틀이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그것이 온전하게 감당하지 못하는 영역에까지 확장되어 적용되는 경향이 있다. 불평등의 문제틀이 담아내기에는 불충분한 사안들을 품을 수 있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불평등에 대한 해법: 세제개혁과 기본소득

이상에서 고찰한 대로 불평등 문제틀에 일정한 반성이 필요한 것이라면, 그러한 문제틀에 입각해 제시되는 해법에 대해서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 흔히 두 가지 해법이 제안되고 있다. 하나는 세제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유지에 충분한 소득을 공적으로 보장해주자는 것이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는 최근 기본소득(UBI: Universal Basic Income)론이 주목을 받고 있으며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지지세력을 확보하고 있다. 반면 토마 피케티 등이 제안하고 있는 종류의 과감한 세제개혁을 주요 의제로 내걸고 있는 정치 세력은 국내에선 아직까지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피케티가 그의 베스트셀러 <21세기 자본>에서 내놓은 세제개혁안의 골자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세제의 누진성을 높인다. 둘째, 소득 불평등의 상당 부분이 자산소유 불평등에 기인하는 만큼, 자산소유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자산보유세를 매기되, 자산의 범지구적 이동성이 극대화된 오늘의 사정을 반영해 이를 세계적인 차원에서 시행한다. 그런데 흔히 오해되는 것과는 달리, 피케티의 제안은 통상적인 ‘재분배 정책’과는 다르다. 즉 세율을 높여 부자에게서 세금을 많이 걷고 이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자는 게 아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높은 세율이 개별 경제주체의 행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다. 예를 들어보자. 현재 우리나라 소득세제에서 최고 세율은 5억 원 넘는 소득에 대해 적용되는 42퍼센트다. 그러니까 연소득이 10억 원인 사람이 1억 원을 더 벌면 4천2백만 원의 세금이 빠진 5천8백만 원만이 그에게 돌아간다는 뜻이다. 이때 그는 1억 원을 더 벌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가치가 있다고 여길까? 이제 연소득 10억 원이 넘는 구간에 대해 80퍼센트의 최고 한계세율이 신설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위 사람이 1억 원을 더 벌었을 때 실제 그의 주머니로 들어오는 금액은 2천만 원으로 줄어든다. 이때 그는 더 일하고자 할까? 원론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개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앞의 경우에 비하면 누구에게서라도 일할 의욕이 크게 줄어들지 않을 수 없으리라. 대체로 이와 같은 세제 아래서는 10억 원 이상의 연봉을 받고자 하는 개인도, 주고자 하는 기업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의도대로 시행된다면 이러한 세제의 도입은 사실상 ‘최고임금제’를 설정하는 효과를 낼 것이고, 이는 그 자체로 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상당 정도 누그러뜨릴 가능성이 있다.

이에 비해서 불평등에 대응하는 두 번째 안은 이른바 ‘부자증세’를 통해 늘어날 세수를 소득 획득에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에게 나누어주자는 제안이다. 이것이 피케티 식의 제안과 다른 점은 세율 인상이 부자들의 행위를 변경시키는 효과에 주목하기보다는 그러한 조치가 실제로 커다란 세수의 증대를 낳으리라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재분배정책은 20세기 중반에 형성된 서구의 복지국가에서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당시에 비해 소득분배의 불균형이 훨씬 극심한 동시에 4차 산업혁명이라는 조건 아래서는 영속적이기도 하므로 재분배도 훨씬 규모도 크고 항구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정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입장이 바로 기본소득론이다. 언뜻 기본소득은 일반적으로 복지국가에서 일부 계층에 대하여 주어지는 소득보조와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옹호자들은 양자 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즉 자산소득조사(means test)에 의거해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일부 국민에게만 선별적으로 지급되는 복지국가 아래서의 소득보조와 달리 기본소득은 아무런 조사 없이 모든 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지급된다는 것이다. 비록 현실의 여건에 따라 보편성이 어느 정도씩은 희생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보편성은 그 옹호자들이 내세우는 기본소득의 핵심 특징으로서, 거기에는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의 충격이 인구의 일부에게만 국한되지 않으리라는 판단도 반영되어 있다.

기본소득이 최근 들어서 처음 제안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기본소득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멀게는 고대 그리스까지 그 기원이 거슬러 올라갈 정도이고 근대적인 맥락에서 기본소득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도 18세기 말이다. 당시 새롭게 자리를 잡아가던 자본주의적 경제 질서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농촌을 기반으로 한 생산-분배 체계의 교란을 수반했는데, 이때 대규모로 토지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람들에게 안정적인 소득 기반을 제공하자는 것이 기본소득의 애초 취지였다. 그러던 기본소득이 오늘날 다시금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거치며 세계적으로 소득불평등이 극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을 통해 기계에 의한 인간 노동의 대체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다수 대중의 주요한 소득 기반(고용과 임금)이 줄어들 것이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도 미국에서 이른바 케인스주의적 경제 재생산 체제가 위기에 처했던 1960년대 후반에도 기본소득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타오른 바 있다. 그러니까 기본소득은 경제 구조가 커다란 격변에 휩싸이고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할 때마다 새롭게 소환되곤 했던 셈이다.

이렇게 기본소득론은 분배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대중에게 크게 호소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경제의 (재)생산 구조에 대해선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그 시각이 주로 분배 영역에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한계도 가지고 있다. 보통 자본주의 경제는 생산-분배-지출(소비)의 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겨지며, 각 영역은 그 고유의 내적 논리를 가지면서도 서로 구조적으로 얽혀 상호결정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분배는 생산의 결과이고, 상이한 분배 패턴은 상이한 소비 패턴을 낳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경제에 대한 핵심 문제제기를 분배 영역에 대고서 한다는 것은 생산 그 자체의 결과는 수용한다는 태도를 은연중에 함축하는 셈이기도 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사항은 기본소득론자들 자신에 의해 가장 적극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들은 기본소득이 결코 무상이 아니며 생산 영역 내부에 그 기원이 있음을 입증하는 데 누구보다도 열심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류 모두의 자산인 자연의 조화에 따라 생산된 농산물은 그 토지소유자만의 것일 수 없고,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 기업은 모든 이용자의 참여와 노동(!)이 없다면 생기지 않았을 ‘네트워크 효과’에 입각해 광고수입 등을 거두므로 그 이윤의 일부는 그 이용자들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는 등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정 투쟁’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 것’이라는 관념이 근대의 소유권 개념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은 흔히 인정되지만, 마르크스가 갈파했듯이 그러한 원칙은 근대사회가 제 발로 서면서 심대한 전환을 겪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사적 소유는 소경영의 기초이며, 소경영은 사회적 생산의 발전과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 이 생산방식은 생산과 사회가 자연발생적인 좁은 범위 안에서 운동할 때에만 적합하다. (......) 일정한 발전수준에 도달하면 이 생산방식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물질적 수단을 만들어 낸다. 이 순간부터 사회의 태내에서는 이 생산방식을 속박으로 느끼는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정열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 그것의 철폐, 즉 개별적이고 분산적인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생산수단으로 전환되는 것, 따라서 다수인의 영세한 소유가 소수인의 거대한 소유로 전환되는 것, 광범한 인민대중으로부터 토지와 생활수단 및 노동도구를 수탈하는 것, 이 처참하고 가혹한 인민대중의 수탈이 자본의 역사의 전주곡을 이룬다. (......)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 소유(......)는 타인들의 형식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 즉 임금노동의 착취에 토대를 두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의해 축출된다. (......)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으로부터 생기는 자본주의적 취득방식은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낳는다. 이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는 자기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개인적 사적 소유의 첫 번째 부정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은 자연과정의 필연성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부정을 낳는다. 이것은 부정의 부정이다.


-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하) 1044~46쪽 -

자본주의 내에서도 소유가 생산에 입각해 결정되었다면 착취란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착취를 놓아두고 ‘생산에 입각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기본소득론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이 하나 더 있다. 위에서 밝힌 것처럼 만약 ‘생산에 입각한 소유권’이라는 논리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얕은 이해의 결과라면, 왜 오늘날 유력한 자본가들까지도 기본소득을 옹호하고 나서는 것인가? 사람들은 흔히 이 문제를 감성적으로 접근하곤 한다. 한쪽에서는 저 자본가들도 결국 인간이니 측은지심이 있는 게 아니겠냐는 식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도 결국 자본가’라며 기본소득 옹호는 착취와 불평등을 정당화하려는 눈속임일 뿐이라고 치부한다. ‘사람’에 주목한다면 이런 진단도 나름의 일리는 있겠다. 그러나 물질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 문제는 자본가들 간의 분배 투쟁의 한 단면으로 파악하는 게 적절하다. 자본가에게 노동자의 임금은 모순적인 의의가 있다. 그것은 비용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생산한 물건을 구매해줄 소득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아래서 노동소득분배율은 떨어지고 4차 산업혁명으로 고용마저 줄어들면, 생산 측면에서 자본가들은 비용을 줄여 좋겠지만 이는 그들의 상품이 판매되기 어려워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럴 때 대중에게 기본소득이 지급된다면 어떨까? 물론 기본소득이 지급되려면 해당 자본가 자신도 일정액을 기여해야 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십시일반으로 세금을 걷어서 대중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한 뒤 이들이 자신의 물건을 구매한다면, 결과적으로는 동료 자본가나 자산가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자신의 물건 구매에 쓰이게 되는 셈이다. 사태가 이렇다면, 모든 자본가가 기본소득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개별 자본가로서는 기본소득 재원 마련을 위한 자신의 기여액(세금)과 상품 판매를 통한 이윤액을 비교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르면, 첨단산업, 또는 독점산업의 자본가일수록 기본소득에 대한 지지도가 높을 가능성이 있다. 요컨대 이 경우 기본소득은 자본가가 동료 자본가를 수탈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사적 소유자에 대한 수탈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제 수탈의 대상은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다. (......)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하), 1045~46쪽 -

그러나 과연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것이고, 또 얼마나 일반화될까? 4차 산업혁명이 눈에 확 띌 정도로 가시화된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기술적 조건에서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자본가들 간의 분배투쟁’ 보다는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 착취’라는 자본주의의 보다 일반적인 모습에 가깝다. 여기서는 새로운 규범들에 대하여 합의가 이루어지고, 경제(성장)의 새로운 영역들을 중심으로 투자와 고용이 증가해 나가리라고 가정하는 게 합리적이다(생태/환경은 그 핵심 영역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 자체가 일종의 ‘투쟁의 장’이라는 점이다. 이 투쟁에 어떻게 임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대다수는 다시금 착취의 굴레에 갇히게 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해방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고작 얻어낼 것이 알량한 ‘(기본)소득’이어야 할까.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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