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800m의 둘레길도 거뜬히 걷다.

지난 10월 8일자로 지리산 둘레길이 세계 최장(295.1Km) 들꽃길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세계 최대, 최초라는 것에 너무 매달리느라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던 우리나라의 여러 사례들이 떠올라 걱정과 우려의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론 지리산 둘레길이 산속 깊이 들어가지 않고 그냥 걷는 길섶에서도 숱한 들꽃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기에 나름의 의미는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튼 이번 초록걸음은 가을 들꽃에 좀 더 초점을 맞추어 걷기로 했다.

 

▲ 초록걸음 단체사진(사진 = 최세현)

이번 초록걸음의 출발지 단속사지는 문화재 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단속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절로 조선 중기에 불타 폐허가 되었다. 지금은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 2기가 남아서 옛 영화를 전해준다. 한창 번성할 때는 수백 명의 스님들이 공부를 할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일설에 의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자 원래 절 이름이었던 금계사를 단속사(斷俗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이후 절을 찾는 사람이 없어지고 마침내 절이 폐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단속사지 바로 옆엔 산청삼매 중의 하나인 정당매가 있었는데, 고려 말기의 문신인 강회백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벼슬이 정당문학이어서 정당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몇 해 전 600여 년의 삶을 마감하고 말았다. 산청군에서는 후계목이라며 어린 매화나무를 정당매 옆에 심긴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작위적으로 보일 뿐이었다. 평소에 정당매 관리에 좀 더 세심한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 가을빛으로 물든 웅석봉길(사진 = 최세현)

단속사지를 지나면서 시작된 임도는 웅석봉 산허리를 돌아 해발 800m까지 지나게 된다. 지리산의 동쪽 끝자락 웅석봉은 해발 1,099m로 산청군 산청읍 내리와 삼장면 홍계리, 단성면 청계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청읍에서 웅석봉을 보면 마치 산청읍을 감싸고 있는 담장처럼 보이는데 유산(楡山) 또는 웅석산(熊石山)이라고도 하며, 1983년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꼭대기가 곰같이 생겼다 하여 곰바우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웅석봉 임도 길섶엔 길 따라 군락을 이루고 있는 히어리의 노란 단풍이 단연 압권이었다. 지리산의 깃대종인 히어리는 이른 봄 그 노란 꽃만큼이나 가을 단풍 또한 발걸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길가에 지천으로 핀 쑥부쟁이, 용담, 자주쓴풀, 산국, 꽃향유, 취나물꽃 등등이 말 그대로 세계 최장의 들꽃길임을 증명해 보이는 듯 했다. 거기다가 만나기 힘들다는 흰용담까지 알현하는 횡재를 했다.

 

▲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자주쓴풀, 흰용담, 용담, 히어리(사진 = 최세현)

뒷이야기지만 필자가 흰용담 사진을 SNS에 올렸더니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었다. 사진을 어디서 찍었는지 정확한 위치를 알려달라고... 이런 전화는 참으로 난감한 전화다. 식물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 사진 찍는 사람들이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화한 사람의 성향을 일일이 파악해서 답을 줄 수도 없는 일이다. 필자는 일부러 떠나는 들꽃 탐사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 깊은 산속 만나기 힘든 귀한 들꽃보다 그냥 길을 걷다가 길섶에서 흔하게 만나는 들꽃들을 더 좋아하는 까닭이다. 아무튼 저 흰용담을 해마다 쭉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 노랗게 물든 히어리(사진 = 최세현)

웅석봉 헬기장 아래에서 도시락을 먹고 웅석계곡 쪽으로 내려가는 길, 어천마을 쪽에서 올라오면 22개 지리산 둘레길 중 가장 악명 높은 가파른 구간인데 우린 내려가는 길이라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그래도 근 40분 정도를 내리막길만 걷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다들 팍팍한 무릎에 여간 힘들어하지 않았지만 통영에서 아빠 따라 참가한 8살 은수의 재잘거림과 경쾌한 발걸음에 오히려 어른들이 힘을 받으며 물소리 들리는 웅석계곡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천계곡 상류인 웅석계곡길은 둘레길이 아닌 웅석봉 등산로로 이용되는 구간으로, 인적이 드문 길이긴 하지만 여름철엔 알음알음으로 찾는 한적한 계곡 피서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웅석계곡이 끝나는 곳에 어천마을이 있고 웅석계곡을 지나온 계곡 물들은 어천계곡을 지나 경호강으로 흘러들게 된다.

이번 초록걸음이 걸은 거리는 10Km 남짓으로 난이도는 상급 정도라 할 수 있는 힘든 구간이었지만 눈부신 가을 햇살과 알싸한 바람 그리고 길가에 무수히 피어있는 가을 들꽃들에서 위로와 치유를 받는 걸음이었다. 이제 해는 점점 짧아지고 바람의 계절이 시작되리니, 따스한 온기 느낄 수 있도록 길동무들에게 시 한 편 들려주며 조금은 힘들었던 10월의 초록걸음을 마무리했다.

 

▲ 가을빛으로 물든 웅석봉길(사진 = 최세현)

숲의 풍경 / 김리영

숲에 가 보았다

숲이 깊어질수록

나 같은 떠돌이 하나 없고

나무들은 서로 껴안는구나

모두들 지긋이 뿌리를 박고

오래 떠날 줄 모르는 숲에서

한때 땅 속 깊숙이 침묵으로 내리던

나의 뿌리도

흙만은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벼락을 맞아 타 죽어도

숲에서 부서져 흙이 될 나무들아

뿌리째 끊어지며 날아오른 내 목숨

굽은 나뭇가지 몇 개가

잘 살아 돌아왔다며 다독인다

따스히 어깨 감싸 안는 나무들이 있는 숲에서

나는 멀리 떨어져 살고 싶지 않았다

반딧불 눈물 뿌리며 날아다니는 길 따라

나는 너무 멀리 돌아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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