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속 고독한 섬이었던 성심원을 가다

태풍 타파가 북상한다는 소식에 초록걸음을 신청했던 길동무들의 참가 취소가 속출했지만 그래도 초록걸음을 멈출 순 없었다. 단촐한 길동무들은 지리산 동쪽 끝자락 웅석봉 산행이 시작되는 지곡사에 모여 걸음을 시작했다. 비옷을 챙겨 입은 모습들이 마치 각양각색의 꽃송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걷는 이들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비 내리는 날 둘레길을 걷는 길동무들의 뒷모습은 시작부터 더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 9월 지리산 초록걸음 길동무들(사진 = 최세현)

지곡사에서 수액 채취를 위해 설치된 고무호스가 지금까지도 방치되어 있는 고로쇠나무 길을 따라 10여분을 걸어 도착한 선녀탕, 본격적 웅석봉 산행이 시작되는 그곳엔 나무꾼 대신 지리산 둘레길 인증 스탬프 박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내리는 비에 웅석봉 자락을 휘감은 운무를 만끽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바람재다. 산청의 너른 들녘인 내리한밭을 지나온 바람이 경호강 따라 성심원이 있는 바람의 마을, 풍현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야트막한 고개 바람재도 이제는 예전의 그 좁은 길이 아니라 2차선 아스팔트 도로로 변했다. 이렇게 둘레길도 거대한 진화(?)의 물결은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바람재 넘어 성심원 가는 길은 경호강을 끼고 걷게 된다. 그 초입에는 뚱딴지가 그 노란 꽃을 피워 빗속의 우리들을 반겼다. 뿌리를 돼지 사료로 사용했다고 해서 돼지감자로도 불리는 뚱딴지, 필자는 그 뚱딴지 꽃을 볼 때 마다 지리산 자락 남원에 살고 있는 복효근 시인의 절창 ‘적막은 키가 크다’를 떠올리게 된다.

 

▲ 바람재를 넘어 성심원으로 가는 초입에 핀 꽃(사진 = 최세현)

 

적막은 키가 크다 / 복효근

 

요즘 들어 뚱딴지꽃이 좋아졌다

초가을 저녁 무렵

키 큰 뚱딴지꽃 적막이 좋다

내 그 곁에서 눈물을 들키면

뚱딴지는 그 노란 뚱딴지꽃으로

죄 없이 뚱딴지의 이름을 얻어

뚱딴지같이 꽃 피우는 생도 있다고

달래주지는 않고

뚱딴지 뚱딴지 저 혼자 꽃만 핀다

그러면 내 눈물은 뚱딴지같아서

그렇지

여기서 엎어지면 뚱딴지도 똥단지도 아니리

모든 적막이 절망이 되는 것은 아니리

아니리 아직은

키 큰 적막은 갈 길이 멀어서

초가을이어서

 

▲ 9.21 기후위기비상행동 퍼포먼스를 초록걸음의 방식으로 진행했다. (사진 = 최세현)

경호강 강바람 맞으며 도착한 성심원 입구에서 우리 길동무들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세계인들이 함께 하기로 한 9.21 기후위기비상행동 퍼포먼스를 초록걸음의 방식으로 진행했다. “기후야, 그만 변해. 내가 변할게” “기후위기, 지금 행동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라며... 한국의 그레타 툰베리가 된 7살 혁노와 10살 세아 그리고 길동무들과 함께 피켓팅 인증샷을 남기고 도착한 성심원 역사관에는 한때 육지 속 고독한 섬으로 존재했던 성심원의 아픈 역사 60년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그 역사관 입구 안내문을 읽으면서 마음 한 쪽이 먹먹해져 왔다.

 

▲ 9.21 기후위기비상행동 퍼포먼스를 초록걸음의 방식으로 진행했다. (사진 = 최세현)

“한센이라는 주홍글씨가 준 낙인, 세상 사람들의 편견과 차별, 그 아픔들을 간직한 채 생활인들 스스로의 손과 발로삶의 자리를 가꾸어 왔습니다. 그렇게 일구어진 성심원의 건물, 나무, 풀 한 포기 한 포기 속에는 아픔과 눈물과 땀이 배어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1959년 사람들을 피해 인적이 드문 오지로 여기고 찾아들었던 이곳 이제는 모두 산청의 명당이라고 부러워합니다. 성심원 뒷산 웅석봉은 마치 성모님처럼 우리를 포근히 따사롭게 감싸 안고, 앞으로 흐르는 맑고 푸른 경호강은 숲 속 새들의 노래와 어울려 찬미가를 부르는 듯도 합니다. 성심원 역사관은 이러한 성심원의 발자취를 담담히 담아낸 풍경과도 같습니다. 작은형제회와 한센 별력 생활인들이 함께 일구어 온 어언 60년의 삶, 그 세월, 그 삶을 여기에 기록합니다. 님의 마음으로 그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성심원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리산 둘레길이 성심원을 가로 질러 지나고 일반인들도 들어와 요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복지시설로 거듭났다. 이제는 더 이상 육지 속의 고독한 섬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리산둘레길 안내센터 공간을 흔쾌히 내어 준 성심원이 한없이 고맙기만 하다. 내리는 비를 피해 성심원 매점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다시 경호강을 따라 길을 나섰다.

 

▲ 9월 지리산 초록걸음 길동무들(사진 = 최세현)

성심원에서 어천교까지의 2Km 남짓한 둘레길은 필자가 손가락 꼽는 둘레길 중 한 구간이다. 훼손되지 않은 오솔길에 경호강 물소리 들으며 호젓하게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초록걸음 길동무 중 막내인 7살 혁노가 걷는 내내 내리는 비 때문에 마지막 이 구간에서는 징징거리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정말 씩씩하게 잘 걸어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필자가 오히려 싱그러움을 수혈 받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비와 운무과 함께 길동무들의 뒷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게 기억될 9월의 초록걸음이 어천교에서 마무리되었다. 이제 가을빛 완연해질 지리산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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