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지리산을 껴안고 걷는 길

장마와 태풍이 끝나고 걷는 8월의 초록걸음은 흘린 땀을 보상받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에 상사폭포가 있는 둘레길 5코스를 택했다. 함양 동강마을에서 산청 수철마을까지의 이 구간은 함양과 산청의 경계를 넘는 길로 아픈 지리산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청 방곡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이 추모공원은 한국전쟁 당시 통비분자로 몰려 국군들에 의해 집단학살 당한 700여 원혼과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2005년에 조성되었다.

이번 초록걸음은 동강마을도 수철마을도 아닌 산청 가현마을에서 길동무들에게 시 한 편 들려드리면서 그 걸음을 시작했다.

 

▲ 천왕봉과 중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을 배경으로(사진 = 최세현)

 

길에게 묻다 / 박소영

 

온몸 내어주고 나를 받아주는 길을 간다

 

먼 산 바라보고 걸었던

무심히 내딛는 발에 밟힌 생명들에 대한 생각

봄싹 움트듯 돋아나더니 개미처럼 분주하다

 

잎과 열매 다 내어준 채

묵언수행에 든 은행나무에 기대어 하늘을 본다

 

유리창처럼 투명한 하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듯한데

저처럼 맑아질 수 있는가

나는,

 

은행나무와 이 땅의 모든 것들, 하늘도 길 위에서

살고 있었음을 오늘에야 알게 된

나는,

누군가에게 길이 되어준 적이 있는가

 

▲ 뒷모습이 더 아름다운 초록걸음(사진 = 최세현)

가현마을에서 고동재까지는 둘레길이 아닌 방곡이나 오봉마을 사람들이 산청읍으로 장보러 넘나들던 길로 지금은 차량들도 다닐 수 있는 임도로 조성되어 있는 길이다. 가현마을 입구에서 만난 동네 노부부는 구부정한 허리로 참깨를 털고 계셨다. 필자가 귀농학교 다닐 때 8월 땡볕 하우스 안에서 참깨를 털어본 경험이 있기에 그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참께 한 톨마다에 얼마나 많은 땀이 배여 있을지...

팍팍한 임도를 지나 도착한 고동재(해발 550m), 밤머리재와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동부능선과 연결되는 고개로 모양이 고동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동재에서부터 본격적인 둘레길이 시작된다. 능선을 오르내리며 자연 그대로의 오솔길이 계속된다. 그 오솔길을 따라 30분가량 걷다보면 다다르는 산불감시초소에서의 조망은 가히 일품이라 할 수 있다. 북쪽으로 천왕봉과 중봉 그리고 함양독바위 보이고 동쪽으론 왕산과 필봉산이 펼쳐진 멋진 풍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동재에서 쌍재까지는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예전에 함양에는 곶감장이 서지 않아 마천 사람들이 덕산 곶감장으로 가기 위해 넘든 고개가 쌍재다. 지금도 쌍재엔 둘레꾼이 막걸리 한 잔 하며 쉬어 갈 수 있는 주막이 성업 중이다. 쌍재 지나면서 개울을 따라 걷게 되는데 이 개울의 물들이 모여 상사폭포의 큰 물줄기를 이루게 된다. 상사폭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으로 끝난 처녀 총각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폭포로, 둘레길에서 약간 비껴있어 걷기에만 열중하다 보면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8월의 무더위 끝에 만난 상사폭포에서 초록걸음 길동무들은 20m 높이에서 쏟아지는 물방망이를 맞으며 흘린 땀을 말끔히 씻어냈다. 쌍재에서 상사폭포 지나 방곡마을까지의 둘레길은 필자가 강추하는 둘레길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구간이기도 하다.

 

▲ 한국 현대사의 아픔이 묻어있는 산청함양추모공원(사진 = 최세현)

8월 초록걸음은 방곡마을 산청함양추모공원에서 좌우 대립으로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705명의 원혼들을 기리며 마무리되었다. 어린 아이에 노인들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희생당한 그 원혼과 긴 세월 그 아픈 상처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유족들에게 과연 국가란 무엇이었을지... 이렇듯 지리산 둘레길 곳곳엔 한국현대사의 아픈 상처들이 남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이번 초록걸음을 걷는 내내 중1 여학생 4명의 경쾌 발랄했던 그 수다와 깔깔대던 웃음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어머니의 산 지리산을 두 발로 걸으면서 그 속에 깃들어 사는 뭇 생명들을 만나는 일야말로 가장 긍정적인 환경운동이란 생각에 10년 넘도록 숲샘이란 이름으로 지리산 둘레길 길잡이를 자청하고 있는 까닭이 어쩌면 이 아이들 때문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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