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倍야. 귀 기울여 들어서 安排는 절대 되지 말라

오랜 세월 지나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그 옛날 일일일식(一日一食)을 자식들에게 철저하게 가르치신 거였다. 돌멩이도 삭일 나이의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아침 한 끼만 차려주셨다. 나머지는 알아서 먹든지 말든지 하라는 건지, 내일 아침까지 참으라는 건지 매우 헷갈렸다. 옥수수 급식빵이 무슨 까닭인지 배달되지 않은 날 학교가 파한 뒤 오뉴월 땡볕을 무릅쓰고 돌아온 집에는 일 나가신 어머니는 당연히 안 계셨고 삶은 보리가 망태기에 담겨 저 높은 시렁에 걸려 있었다.

물론 동생과 나는 거기에 손이 닿을 수 있었다. 내가 엎드리고 동생이 올라서서 망태기를 조심조심 내리면 주린 창자를 달랠 수 있었는데... 울부짖는 동생을 애써 모른 체 했다. “하루 한 끼만 먹어도 산다.” 나는 맏이였고 창자가 요동을 치든, 어머니가 야근에 퇴근을 늦추든 어머니의 가르침에 입각해 견뎌야 했다. 무릇 존심이란 이런 것이다.

▲ 박흥준 상임고문

사흘을 굶은 적도 있었다. 역시 요즘 같은 오뉴월 땡볕이었다. 방안에 추욱 늘어져 숨만 쉬고 있는데 옆집 개똥이 엄마가 무언가 사발에 담아 들고 왔다. 5살 동생이 벌떡 일어나 사발을 덥석 받았다. 쭈욱 들이켜던 동생이 갑자기 숨과 함께 동작을 멈추었다. 한 10초 쯤 흘렀을까. 내뱉지 않으려 용을 쓰던 동생이 재채기를 하며 토하는데... 끔찍한 검은 물이 입과 코에서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개똥이 엄마가 주신 것은 물에 간장을 두어 술 타서 휘저은 일종의 영양식, 또는 구급약이었는데 사흘 굶은 동생의 가여운 위장은 끝내 이를 받아들이지 못 했다. 동생은 구역질을 한참이나 하더니 이윽고 축 늘어졌다. ‘천 길 땅 밑’(서정주, 춘향유문)을 검은 물로 흘렀던 기억. 누구나 갖고 있다. 그래도 존심을 세우는 건 아무리 굶어도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릇 존심이란 이런 것이다.

아내가 퇴근하기 전 서둘러야 했다. 매일매일 계란후라이만 먹일 수는 없는 일. 가끔은 평거동 금요장에서 사 온 두부 반 모 숭숭 썰어 된장도 끓이고 팽이버섯은 살짝 데치고 고추장 한 숟가락 떠서 식초 두어 방울 뿌린 뒤 젓가락으로 휘휘 저어 놓으면 아내가 맛있게 먹고 아껴두었던 5천 원짜리 한 장 너그럽게 용돈으로 던질 터였다. 5천원을 아껴먹으면 일주일은 견디고 단 하루에 탕진하면 내일이 적막할 따름이라는 공자(空煮)의 가르침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저 닥치면 닥치는 것일 뿐.

하지만 아내는 그날따라 숟가락을 들지 않았고 쳐다보지도 않았고 밥 먹으라는 얘기를 콧등으로 흘렸다.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간은 흐르고 된장이 열기를 잃어갈 무렵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급기야 벌떡 일어나 허공에 대고 분연히 외쳤다. “맛있게 해 놨으면 냉큼 먹어야 할 것 아냐!!” 절대 그래서는 안 될 상황이었는데. 땡전 한 푼 못 벌고 음풍농월하던 나였는데. 그건 없이 사는 사람이 마지막에 내세우기 마련인 존심의 발로였다. 무릇 존심이란 이런 것이다.

아베의 생각은 아마 이런 것이지 싶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명확하게 나와 있다. 고사기(古事記)에서도 엄연히 발견된다. 너희는 얄짤없는 임나일본부였으며 신공황후 이래로 우리의 은혜를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우리 덕에 근대화를 이뤘고 우리 덕에 그나마 밥술을 넘기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 항용 있게 마련인 어떤 약간의 부작용을 트집 잡아서 돈을 더 달라고 떼를 써? 은혜도 모르고 이렇게 나와? 많이 컸구나. 조금 있다가는 우리보다 덜 잘 살 거란 말이지?”

아베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싶다. “그래서는 안 되지. 아암. 너희는 그냥 은혜를 되새기며 현재에 만족해야지. 우리의 ‘영원한 존심’을 잠시라도 상하게 하면 큰일 나지. 내 너희를 어여삐 여겨, 한없는 너그러움을 한 번 더 발휘해서 급기야 참지 못 하고 울타리를 벗어나려 땅띔을 하려는 너희에게 그러지 말라고 엊그제 약간의 쿠션을 준 것뿐인데 그 정(情)도 모르고 미친 듯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는 앞으로 영원히 못 만날 수 있지. 그래도 괜찮다구? 천만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아. 가끔 치받는 건 뭐 그럴 수 있는 거라고 얼마든지 생각해. 하지만 여기까지야. 더 나아가면 곤란해진다. 꿇어!!”

무릇 존심이란 이런 것이다. 아무리 배고프더라도 당당히 먹을 환경이 보장되지 않으면 그냥 단식해서 죽어버리겠다는 의지. 무릇 존심이란 이런 것이다. 아무리 추워도 곁불은 쬐지 않겠다는 결연한 마음가짐. 무릇 존심이란 이런 것이다. 내일 죽더라도 내 자식에게는 이런 엉터리 세상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고집. 무릇 존심이란 이런 것이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그 무엇을 보는 순간 비록 장렬하게 전사하더라도 뻣뻣이 서서 결연히 그에 맞서는 아름다운 모습. 그걸 마지막까지 견지하는 게 존심이다.

아베야. 존심이라고 다 존심이 아니다. 설명해 주리? 네가 갖고 있는 건 ‘오만’이지 ‘존심’이 아냐. 어렸을 적엔 일일일식에 목숨을 거는 게 존심이었다면 웬만큼 나이를 먹은 뒤에는 존심은 그 주소를 사회정의 쪽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법. 인류평화에 역행하는 그 어떤 행태에 분노하고 이를 바로잡으려 과감히 행동하는 게 바로 존심이다. 그런데 너는 그게 아냐. 어떤 옛날을 잊지 못 해 시대를 거스르고 있는 게 바로 너야. 과거 너희 때문에 충분히 고통스러웠던 이웃을 한 번 더 고통에 빠뜨리려는 게 바로 너야. 알어?

그리 하여 오늘날 주님의 말씀은 아마 이런 게 아닐까. “과거에서 온 괴물 아베는 그러니 들으라. 너는 존심을 상하려야 상할 존심조차 없는 인간이다. 아니, 인간에 가까운 그 무엇(짐승)이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존심 내세워 고집부리지 말고 적당히 그만 하라. 그만 할 명분은 스스로 찾으라. 찾아보면 가까이에 여러 가지 널려 있다. 그런데도 고집을 계속 부리면 사태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된다. 그러면 너만 힘들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 모두 힘들어진다.”

그리 하여 오늘날 주님의 말씀은 아마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해 보라. 아베야. 전 세계가 보고 있는데 온갖 앞뒤 안 맞는 말로 애처롭게 자신을 변명하는 게 지금의 너이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 천만에. 너는 강자도 아닐뿐더러 인류의 양심이 조금씩 영역을 넓혀 온 이상, 세계는 더 이상 네 편이 아니다. 정의는 양심의 산물이다. 지금은 150년 전 구한말이 아니다. 모두가 돌아앉고 너만 고립되기 직전이다. 그러니 아베는 들으라. 과거를 쓰라리게 인정하고 이웃 나라에 백배 사죄하라. 아울러 평화와 번영을 위해 늦었지만 함께 가자고 애걸하라. 살려달라고 빌어라. 네가 살 길은 그 것 뿐이니. 서두르라. 네가 눈 똥은 네가 치워라. 지금 치우지 않으면 정말 늦다. 安倍(아베, 평화를 배가하다)라는 이름 얼마나 좋으냐. 지금부터라도 이름값을 하기 바란다. 먼 훗날 安排(아베, 평화를 배척하다)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기 싫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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