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도 막지 못한 초록걸음, 운무 속 지리산의 아름다움을 보다.

태풍 다나스로 인해 지리산 초록걸음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일정을 일주일 연기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이번엔 장맛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지리산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길동무들은 기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안상학 시인의 ‘장마’라는 시를 가슴에 품고서...

세상 살기 힘든 날 / 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 / 강가에 나가 /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 보면 / 저렇게 살아 갈 수 없을까 / 저렇게 살다 갈 수 없을까 / 이 땅에 젖어들지 않고 / 젖어들어 음습한 삶내에 찌들지 않고 / 흔적도 없이 강물에 젖어 / 흘러 가버렸으면 좋지 않을까 / 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 뿌리 내리지도 않고 / 무심히 강물과 몸 섞으며 / 그저 흘러 흘러갔으면 좋지 않을까 / 비조차 마음 부러운 날 / 세상 살기 참 힘들다 생각한 날 / 강가에 나가 나는

 

▲ 벽송사 전경(사진=최세현)

걸음을 시작한 벽송사는 내리는 비로 인해 고요하고 차분해 보였다. 때마침 음력 7월 15일까지 진행되는 하안거(夏安居) 중이라 더더욱 고즈넉한 모습이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벽송사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그 말에 동의할 수 밖에.

[편집자주] 하안거는 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3개월 동안 승려들이 외출을 금하고 참선을 중심으로 수행에만 전념하는 제도를 말한다.

판소리 ‘변강쇠전’의 무대이기도 한 벽송사는 신라시대에 창건, 조선 중종 15년(1520년) 벽송 지엄대사가 개창했고 한국전쟁 때 미군기의 폭격으로 소실되었다가 1963년 원응 구환스님이 다시 짓기 시작하여 1978년에 완성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는데, 국군이 야음을 틈타 불시에 기습해 불을 질러 치료 중이던 인민군 환자들이 많은 희생을 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벽송사 제일 위쪽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고 그 옆엔 미인송과 도인송이 300년 넘는 세월동안 벽송사와 함께 칠선계곡을 굽어보고 있다. 미인송이 도인송을 흠모해 자꾸만 그 쪽으로 기울어져 이제는 받침대 없이는 쓰러질 듯 보이는 건 필자만의 느낌일까.

 

벽송사를 돌아보고 서암정사 입구에서부터 의중마을까지의 구간을 걷게 되는데 이 길은 22개 둘레길 코스 중 맨 먼저 조성된 구간이다. 지금도 원시림 그대로의 느낌이 남아있어 필자가 좋아하는 둘레길 베스트 5에 포함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이 구간의 끝자락 의중마을에는 500년 된 느티나무가 마을을 굽어 보살피고 있는데 여전히 정정하신 모습으로 그 자리 지키고 계신다. 이 나무 어르신 곁을 지날 땐 길동무들에게 반드시 껴안아 보길 권하는 걸 잊지 않는다.

 

▲ (사진=최세현)

이번 초록걸음은 지역 경제에 일조하자는 차원에서 점심 식사를 도시락 대신 칠선계곡 입구에 있는 칠선 산장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칠선 산장 주인장은 지리산댐백지화운동을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20년 넘는 세월동안 지리산댐백지화 함양대책위 위원장을 맡아 댐 반대운동을 이끌어 오신 분으로 지리산댐 반대운동의 산 증인이시다. 지난 해 말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지리산댐 백지화 선언을 이끌어 냈기에 이제는 칠선산장 일에만 전념하실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길동무들과 함께 흐뭇한 마음으로 칠선산장의 산채비빔밥을 맛나게 먹을 수 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는 설악산 천불동계곡 및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계곡인 칠선계곡 그 맑은 물에서 물놀이를 덤으로 했다.

 

▲ 둘레길을 걷고 있는 시민들(사진=최세현)

오락가락 하는 빗속에서 오후 걸음은 용유담에서 시작해 아스팔트 포장길인 둘레길 대신에 함양군이 엄천강을 따라 조성한 전설탐방로를 걸었다. 장맛비로 인해 황톳물이 넘실대는 엄천강은 마천(馬川)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말이 달려오듯 그렇게 흘러왔다. 그 엄천강을 따라 도착한 종착지는 세동마을이다. 전형적인 지리산 산촌마을로 한 때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닥종이 생산지이기도 했던 마을이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이 마을의 모든 집들은 산과 계곡에서 자라는 억새로 띠를 이어 얹은 샛집이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 7월 초록걸음에 함께한 아이들과 (사진=최세현)

이번 7월의 초록걸음, 신나게 걸어준 막내 초등 2학년 민정이를 포함해 함께 걸어준 길동무들이 장맛비에 후줄근히 젖긴 했지만 비와 운무 속 또 다른 지리산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흐뭇해하는 길동무들의 얼굴에서 필자는 보람과 함께 뿌듯함을 느겼다. 또 다시 다음 초록걸음을 상상하며 발걸음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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