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렬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요즘 ‘토착왜구’라는 말이 유행이다. 역사학자 전우용이 SNS에서 처음 소개한 이 말은 1910년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탄되는 혼란스런 정국에서 나왔다. 전우용에 따르면 1910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토왜천지(土倭天地)’라는 글에서 토왜를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인종(人種)’으로 규정하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는 고위 관료층과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을 지지한 정치인, 언론인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했다. 대한매일신보는 토왜를 한마디로 ‘얼굴은 한국인이나 창자는 왜놈인 도깨비 같은 자’라고 정의했다. 이 말이 유행처럼 됐다는 말은 최근 들어 을사늑약 이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토왜가 보여준 행태, 즉 일제의 조선침략을 옹호하고 이를 돕기 위해 차마 제 얼굴을 들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을 거침없이 저지르는 인면수심의 언행을 하는 자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최용익 전 MBC논설위원

이 말이 나온 것은 지난 3월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나경원의 발언이 도화선이 됐다. 최고위원회의에서 “해방 후에 반민특위로 인해서 국민이 무척 분열했던 거 모두 기억하실 것”이며 "또다시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해주실 것을 말씀드린다"고 발언함으로써 파문을 일으켰다. 일제 잔재인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립된 반민특위가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 국민을 분열시켰다는 주장을 편 것이다. 물의가 일자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손 658명의 이름으로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나의 발언에 대해 “토착왜구와 같은 행동”이라며 의원직 사퇴를 요구한 것이다. 이들은 “친일파 이완용이 3.1 운동을 무산시키고자 이를 ‘몰지각한 행동’, ‘국론 분열’이라고 한 것처럼 나경원이라는 몰지각한 정치인이 이완용이 환생한 듯한 막말과 행동을 일삼고 있다”고 질타했다. 나는 이전에도 일왕의 생일 축하연과 자위대 창설 기념식에 참석해 입길에 오르기도 했었다.

당시 대한매일은 토왜 세력을 4가지로 분류했다. 그 첫째는 뜬구름 같은 영화를 얻고자 일본과 이런저런 조약을 체결하고 그 틈에서 몰래 사익을 얻는 자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는 고위 관료층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암암리에 흉계를 숨기고 터무니없는 말로 일본을 위해 선동하는 자로 일본의 침략 행위를 지지한 정치인, 언론인이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각각 일본군에 의지하여 각 지방에 출몰하며 남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자로 친일단체 일진회 회원들을 예로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온갖 거짓말을 날조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독을 퍼뜨리는 자로 토왜들을 지지하고 애국자들을 모험하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시정잡배를 들고 있다.

일본 총리 아베가 느닷없이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 조치를 일방적으로 발표한 뒤, 각 분야에서 나타나는 대응행태를 보면 110여 년전 일제 침략의 위기에 몰린 조선에서의 행태를 쉽게 연상할수 있다. 그 행태가 아주 유사하기 때문이다.

먼저 나경원이 소속된 자유한국당(이하 자한당)이 치고 나왔다. 자한당은 대법원의 강제징용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무역보복을 “우리 정부가 자초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당 대변인 전희경은 “한일 관계에서 실익우선과 현실주의적 접근이 아닌, 이념적 목표 달성에만 매진하면서 역사상 최악의 국면을 맞이한 결과”라고 논평했고 나경원도 ”감정외교, 갈등외교가 가져온 외교참사”라면서 “외교라인에 대한 문책”을 요구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조중동은 사설을 통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과연 우리 정부는 뭘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중앙일보), “강제징용 판결 이후 한·일 관계 악화를 사실상 방치해왔던 청와대와 외교부는 ‘경제 문제’라는 이유로 대응을 경제 부처들에 떠넘기고 뒤로 빠졌다”(조선일보)면서 일본의 근거없는 무역보복의 문제점이 아니라 한국정부를 먼저 비판하는 행태를 드러냈다.

이에 대해 ‘토왜’라는 말을 전파한 전우용은 SNS에서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도 친일파 매국노들은 일본의 파렴치한 침략 행위를 비난하지 않고, 우리 정부가 잘못한 탓이라고 주장했다”면서 “그런 자들의 주장이 지금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으며 “이런 자들이 정권을 장악했을 때의 정부가 한심한 ‘무능 정부’였고, 그들의 외교가 굴욕적 ‘무능 외교’였다”고 비판했다.

전우용은 또 일본에 대해 “아베 정권이 한국 대법원 판결에 한국 정부가 개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제 협박’을 자행하고 있다”며 “조선의 법을 무시해 놓고선 조선 정부에 손해배상을 요구했던 130년 전 일본의 파렴치한 행태가 반복되는 양상”이라고 꼬집었다. “박근혜-양승태의 재판 거래를 보고 한국 정부를 협박하면 재판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한국 내에 일본 정부와 우익에 조종당하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충실히 대변하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제 협박’은 무역전쟁인 동시에 여론전쟁”이라며 “아베는 분명 한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한국 내 ‘친일 매국노=토착왜구’들이 자기를 지지할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과연 조중동과 경제신문들은 일본 총리 아베의 무역보복 조치를 비판하기는커녕 이를 비호하거나 국제법을 들먹이며 일제의 조선합병이 합법적인 것으로 몰아갔다. 식민지배가 합법이고 일본과 전쟁해서 못 이겼으니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그 과정에서 고통받은 개인들도 입을 다무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다.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확산되자 조중동은 연일 ‘흥분하면 일본의도에 말려든다’, ‘우리가 빌미를 제공했다’, ‘반일을 통치의 도구로 삼은 문재인 정권은 각성하라’ 등 비슷한 내용의 주장을 펴고 있다.

“냉정하게 국익을 따져야 할 정권이 도리어 감정 대응에 앞장서면 갈등을 격화시키고 일본에 빌미를 줄 수 있다.… 정권 지지자들은 ‘냉정한 외교적 해법’을 촉구하는 지적에 ‘토착 왜구’라고 공격한다. 감정 분출은 일시적이지만 경제 악화는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민생 피해를 가져온다.”(‘국채보상’ ‘동학운동’ 1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청와대’, 조선일보 7/15 사설)

“일본의 무역보복은 잘못됐지만 이번 사태의 빌미는 분명히 우리가 제공했다. … 만나서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일본의 경제전쟁 도발, 일본보다 더 생각해야 이긴다’, 중앙일보 7/15 칼럼)

“일본은 과거 잘못이 많기 때문에 좀 함부로 해도 된다고 보고, 노골적으로 반일(反日)을 통치의 한 도구로 삼아온 문재인 정권이 외교적 각성을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韓美동맹 흔드는 日 경제보복’, 동아일보 7/15 칼럼)

조중동의 주문은 한결같이 반일감정은 안 되며, 해법은 대통령이 나서서 만나라, 과거사 사죄 요구가 이 사태의 근본 원인이니 그만하라는 것이다. 이들 주장은 공통적으로 한국 정부를 깎아내리고 일본 아베 정부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며, 심지어 대법원 판결 자체가 잘못된 것이니 일본 정부에 한국 정부가 굴복하는 게 살 길이라는 식으로 요약된다.

어느 나라 기자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는 대표적인 주장을 들어본다.

“요즘 상황은 한국의 대법관들이 첫 단추를 이상하게 끼우는 바람에 비롯된 측면이 있다. 발생 원인의 상당 부분을 한국 측이 제공했다는 인식이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널리 퍼져 있기에 우리가 “아베가 잘못했다”고만 외치고 다니면 왕따가 되기 십상이다."

2012년 5월 24일 당시 김능환 대법관이 주심이었던 대법원 소부의 ‘일제 강제징용 사건’ 파기 환송 판결문과 2018년 10월 30일 김명수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명 전원합의체의 판결문을 읽어 보면 세계 일반의 상식과 법의식에 부합하는 논리의 자연스러운 전개는 찾기 어렵다. 대신 현재 이 시점에서 한국인의 민족적 정의를 내세우는 감성적 호소가 많다. 세계사적 보편성보다 한국적 특수성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

사고는 대법원이 치고 고통은 국민이 속절없이 당하는 형국이다. 대법관들의 판단력이 야속하기만 하다.”(“[전영기의 시시각각] 대법관들이 잘못 끼운 첫 단추”, 중앙일보 7/15)

“7년 전 대법원이 심은 시한폭탄이 기어이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 김능환 당시 대법관(현재 율촌 변호사)은 ‘징용 소송’ 상고심에서 징용근로자의 정신적 고통에 대해 일본 기업들이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주문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도 모두 소멸됐다’는 우리 정부의 일관된 입장을 부정한 파격적 판결이었다.

김 대법관은 당시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는 소회를 남겼다. 하지만 그가 쏜 화살은 ‘건국’이 아니라 ‘파국’이라는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다. 일본은 초유의 경제보복 카드를 꺼내들었고, 두 나라는 출구가 어디인지 모르는 미로로 접어들었다.

최고 엘리트집단인 사법기구 내에서 확산되는 민족주의적·정파적 경향에서 나라 문을 걸어 잠그고 권력 놀음으로 지새우다 열강의 먹잇감이 된 구한말을 떠올리게 된다.”(“[백광엽의 논점과 관점]우물 안 판검사들”, 한국경제 7/10)

이뿐만이 아니다. 이 같은 국적불명의 사설과 칼럼이 보수, 수구언론에 판치는 데는 구조적인 연결망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간을 보듯 일본의 극우 매체가 기사화하면 정치인들이 방송에 나와 목소리를 높이고, 관료들이 사실인 것처럼 마무리 짓는다. 순서는 바뀔 수도 있다. 일본 산케이신문의 첫 보도로 시작된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 조치 이후 행보를 보면 잘 드러난다. 일본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연결 고리가 하나 있으며 이 두 세력이 합작으로 한국 정부 공격에 나섰다는 것이다.

자한당과 조중동 등 한국의 극우세력은 일본 측 주장과 논리를 확대재생산한다. 한국 정부가 한일 청구권 협정을 어겼다는 것과 문재인 정부가 일본의 경제보복을 불러왔다는 억지주장을 끌어와 나팔수 역할을 자임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폭행 피해자에게 ‘맞을 짓을 했으니 맞은 것’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격이다. 거꾸로 일본의 극우세력이 한국 극우 세력의 주장과 논리로 한국 정부 공격에 나서기도 한다. 이심전심이자 찰떡궁합이다.

앞으로도 한동안 일본 극우세력과 이를 받아쓰는 한국 극우세력 간의 한국 정부 공격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한 ‘기묘한 동거’가 계속될 것으로 보여 애꿎은 양국의 기업과 국민은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 하이라이트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일본판 제목 바꿔달기’다.

MBC 시사보도프로그램인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는 7월 15일 방송에서, 한·일 경제 충돌 국면에서 정부 책임론을 강조하는 조선·중앙일보 보도가 일본어판에서 더 자극적으로 제목이 바뀌고 이를 통해 반한 감정이 고조되는 정황을 보도했다. 이 신문들은 ‘일본의 한국 투자 1년 새 -40%, 요즘 한국 기업과 접촉도 꺼려’라는 기사를 ‘한국은 무슨 낯짝으로 일본의 투자를 기대하나’로, ‘국채보상, 동학운동 1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청와대’를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국민의 반일감정에 불을 붙일 한국 청와대’로, 각각 원제목을 바꿔 일본어판으로 기사를 제공한 것으로 밝혀졌다.

졸렬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수구언론이 문재인 정부 외교를 ‘실패’라고 비판하기 위해서는 ‘팩트’가 정확해야 한다. 일본어판 제목을 혐한감정을 북돋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바꾸었다면 이미 언론이기를 포기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듯 무리한 변칙과 과장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반일여론의 향배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시민들의 일본 아베 정부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조직적으로 결집하고 있으며, 일본상품 불매운동도 날로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쓰러뜨리려는 정부가 붕괴되기 전에 국민들의 분노가 점점 더 커져 자신들을 집어 삼킬 수 있는 쓰나미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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