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이 부정적 여론을 덮고 민초의 환심을 사려는 꿍심으로 여러 유화책을 내놓는데 그중 통행금지 해제는 약발 받는 특효의 처방이었다. 일 년에 오직 하루 크리스마스 전날 밤을 제하고는 야간 통행을 금지하는 이 조치는 해방되던 해 맥아더의 포고령에 의해 시행됐다. 표면적인 목적은 변환기의 치안 유지였지만 실제로는 이어지는 정권 내내 백성을 옥죄는 억압의 도구로 쓰였다. 그 가쇄가 풀린 것이 점령군 사령관이 제멋대로 선포해 밤길을 막은 지 36년 만에 보안사령관 출신의 전두환에 의해서니 그 숫자의 생김새나 풀어준 자의 행색이나가 참으로 아이러니한 역사의 병렬이다. 그러나마나 이 억압조치의 해제는 노소불문하고 모두의 박수를 받았다. 빼앗긴 ‘밤’을 찾은 사람들이 길바닥으로 몰려나와 만세까지 불렀으니 말이다. 이에 고무된 군정은 두발과 교복자율화로 아이들의 환호를 끌어내고 해외여행의 부분적 자유를 용인하며 엄격히 걸어 닫았던 공항의 빗장도 풀었다.

▲ 홍창신 칼럼니스트

그러므로 밥술깨나 먹는다는 이들이 앞다퉈 여권 사진을 찍어댔다. 일본 단체 여행길에 나선 부산의 노래 교실 주부 17명이 시모노세키에서 코끼리 밥통을 비롯한 주방 기구, 전기제품, 손목시계, 카세트 라디오, 화장품 등의 일제 물건을 잔뜩 사 들고 귀국한다. 아사히 신문은 “한국인 관광객 덕분에 매상고가 급 늘어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다. 이 기사는 일본주재 한국 특파원에 의해 소속 신문사에 송고되고 급기야 온 나라가 들썩인다. 아직 보호무역의 빗장이 완고한데 해외여행규제 좀 늦춰줬더니 연초부터 게걸스럽게 마구 사들인다는 비난이 빗발친다. ‘코끼리 밥통 사건’으로 기억되는 1983년의 서글픈 소사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절 주부에겐 일제 ‘코끼리 밥통’ 버튼 한번 눌러보는 것이 요새 사람 루이뷔똥 클러치를 누르는 만큼이나 호사였다. 그게 비단 ‘밥솥’만이던가. 값싼 노동력을 유일한 경쟁력으로 삼고 저가 물품을 내다 팔아 달러를 벌던 시절의 국산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손톱깎이서부터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일제’라면 목을 매던 참으로 누추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36년의 세월이 또 흘렀다. 중년의 네 남자가 탁자를 가운데 두고 둘씩 나눠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치켜든 채 노려보듯 마주 보고 있다. 남자 둘은 흰 남방에 노타이 차림이고 둘은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붉은 띠의 비표까지 걸치고 있다. 방구석엔 책걸상이 아무렇게나 쌓여있고 치렁하게 전선이 늘어진 바닥은 빗자루 지나간 흔적이 없다. 창가 게시판엔 A4 두 장을 테이프로 찍찍 이어 발라 〈수출관리에 관한 사무적 설명회〉라 붙였다. 책상 위엔 물 한잔도 없다. 일본국 〈경제산업성 별관 1031호〉의 풍경이다.

아베가 우리 수출상품의 고갱이인 반도체 제조의 핵심시료를 수틀리면 안 팔 수도 있다는 공갈을 치고 그래서 관계 급랭한 상황에서 말문을 트러 간 우리 공무원을 대하는 일본 정부의 대응 태도다. 속내야 어쨌건 간이라도 빼줄 듯 “아리가또와 스미마셍”을 외대는 평소의 그것과는 딴판이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의도적 홀대를 보여주겠다는 결기가 사뭇 그럴듯하다. 그런 연극적 상황이 연출되는 뉴스를 들여다보자니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쟤들은 왜 저러는가. 아베는 수출규제 위협의 근거로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 가능한 전략물자의 수출입 관리 부실’을 들지만 속셈이 따로 있음은 어린애도 짐작하겠다. 아베를 비롯한 일본 각료의 언행을 TV로 지켜보며 우리가 100년 세월 동안 갖은 고초를 겪으며 우리를 변화 시켜 왔음에도 그들 시각은 여전히 을사년 경술년 기미년에 머물러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대외비’ 찍힌 1927년 조선총독부 발간의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에 의하면 그들이 분석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다. “조선인은 표면적 형식적인 것을 즐김, 부화뇌동함, 무기력함, 비겁함, 회색처신, 보신술에 능함, 이기적 판단과 진지함 결여, 감격성 결여, 보은성 결여, 독립심 결핍, 사상의 종속성, 형식주의, 당파심, 문약함, 심미관 결여, 공사혼동……”

분명한 것은 지금 정리의 계기가 왔다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끊임없이 우리 아랫도리를 침탈해 왔던 ‘왜’나 그들이 훈도하고 심어 이제 독버섯이 돼 강토를 어지럽히는 토착 왜구를 이참에 가차 없이 들어내는 것이다. 부품 공급이 막혀 내다 팔아 얻던 벌이가 시원찮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고초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폐허에서도 일어나고 피한방울 안 흘리고 촛불 들어 세상을 뒤엎은 우리다.

‘마이클 브린’의 말처럼(좀은 켕기지만) 우리는 문맹률 1% 미만인 세계 유일의 나라, 미국과 제대로 전쟁했을 때 3일 이상 버틸 수 있는 8개국 중 하나인 나라, 노약자 보호석이 있는 5개국 중 하나인 나라, 여성부가 존재하는 유일한 나라, 지하철 안전평가 세계 1위의 나라, 유럽 통계 세계 여자 미모순위 1위인 나라, 미국 여자 프로골프 상위 100명 중 30명을 가진 나라, 인터넷 통신망이 세계 최고인 나라 그리고 세계 2위라 으스대는 경제 대국 일본을 발톱 사이의 때만큼도 안 여기는 나라다.

그리고 우리는 BTS 보유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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