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룡의 소통칼럼] 메르스 사태로 보는 우리사회 단상

21세기의 한복판, 중동에서 날아든 바이러스 한 종이 대한민국 전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극심한 빈부격차와 세대갈등, 비정규직 차별, 인종주의 등 온갖 종류의 분리와 차별을 일삼던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바야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하나가 되었다.

지난 5월 15일 메르스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에 상륙한 이래 21명의 사망자가 나온 어제까지 일어난 사건 사고들은, 밑바닥까지 병들고 썩은 대한민국의 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메르스 바이러스가 하많은 국가들 중에 유독 대한민국에서 창궐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코 우연만은 아니라고 본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이미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했듯이 의료산업의 사영화와 공공의료 파괴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심각한 원인은 극단으로 치달은 우리 사회의 분리와 차별에 있다고 본다.

우선 가장 많은 전파자를 양산하고도 끝까지 실명공개를 피해간 ‘삼성병원’을 보자. 첨단 의료시설과 최고 명의들이 포진했다는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 대한민국 의료산업의 미래를 연다는 삼성병원이 메르스 전파자를 무더기로 양산한 허브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찔한 역설이다. 삼성 병원은 어떤 곳이었나. 가족 중에 위중한 환자가 있을 때 지방 병원에서 온갖 치료를 다하고도 뾰족한 수가 없을 때 달려가던 곳이다. 왠지 그곳에는 아직 일반에 알려지지 않는 첨단 의료기술이 있을 듯 했고, 가망 없는 암환자를 깨어나게 할 최신 의약품이라도 있을 듯 했다. 이러한 ‘삼성’에 대한 미신과 돈에 대한 전 사회적 숭배가 이번 참사를 키운 배경이 되었다. 더구나 ‘의료민영화’ 신화를 가장 강력하게 퍼트린 주체라는 점에서, 삼성이 여는 미래 의료 환경이 어떤 모습일지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현재 메르스 확산은 사실상 통제 불능상태에 빠진 듯 하다. 정부에서 밝힌 전망이나 대책들은 하나같이 ‘헛발질’로 드러나고,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던 불행한 전망들은 하나 둘 눈앞에 실현되고 있다. 국민들은 재난영화 속 주인공을 넘어 공포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메르스의 급속한 확산과 통제불능에 빠진 방역시스템의 밑바닥에는 일상화된 ‘비정규직 차별’과 외주 ‘노동 사용’이라는 우리 사회의 습한 기운이 자리하고 있다.

의사들은 하루 수십개씩 쓰다 버리는 마스크를 병원에서 청소하고 밥짓는 비정규 노동자들에게는 단 한 개도 지급하지 않고 있다. 삼성병원에서 환자를 이송하다 감염된 137번 확진자 역시 비정규직이란 신분 때문에 잘릴까 두려워 이상증세를 말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처럼 폭력적으로 유지되는 우리사회의 ‘투명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단순히 확진환자를 분리하고 격리하는 것만으로 메르스 바이러스 차단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요행으로 바이러스 확산이 수그러들더라도 다음엔 또 다른 사회적 위기가 더 큰 파고로 닥칠 것이 뻔하다.

모든 전염병이 그렇듯이 바이러스는 건강한 숙주까지 죽일 정도로 치명적이지는 않다.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병의 발현이 달라지듯, 한 국가 안에서 발현 양상 또한 그 사회의 건강 수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과연 우리는 메르스 사태를 통해 대한민국을 위중하게 만드는 기저질환이 무엇인지 제대로 성찰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전에 겪었던 우리 사회의 병적기록과 아직 아물지 않은 환부들을 볼 때 성찰은 쉽지 않을 것 같다.

1년만에 지겹다 말하고 애써 잊고자 하는 ‘세월호’, 국가로부터 짓밟히고 사법당국마저 끝내 외면한 쌍용자동차, 그리고 국가적 폭력이 현재 진행 중인 밀양까지. 어쩌면 그동안 나몰라라 했던 환부에 대한 격리조치들이 고름방울로 곪아 미세한 바이러스로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눈에 보이지 않는 메르스에 대한 공포로 전율하는 요즘 나는 두려움을 넘어 묘한 안도감 같은 게 느껴진다.

‘삶은 우리를 연결하지 못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이렇게 우리를 하나로 엮는 구나’고.

농부가 논두렁에 풀을 베면, 낫에 쓰러지는 풀들 옆에 살아있는 다른 풀에서도 미세한 전기적 변화가 생긴다고 한다. 동물이 아닌 식물들도 동료의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하물며 사람은 타인의 죽음과 고통에 어찌 이리 둔감할 수 있는지. 그러고도 살아 있다 자신할 수 있을지...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음에 저항하는 것이다. 끝내 죽음이 삶을 먹어치우기 전까지는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 사는 게 아니겠는가.

바이러스는 스스로 물러나는 법이 없다. 몸에 저항력을 길러 제압하고 몰아내는 수 밖에 다른 방도는 없다. 우리 삶을 옥죄는 신자유주의 거대 자본과 그들의 하수인들도 결코 스스로 힘을 내려놓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로 인한 연결을 넘어 그것에 저항하는 삶의 연대를 우리는 이룰 수 없는 것일까. 나보다 조금 못한 이들과 차별을 누그러 뜨리고, 모두를 살리기 위해 함께 일어서는 약자들의 연대와 저항은 불가능한 것일까.

어디인지 모르지만 메르스 바이러스에 저항하는 항체가 대한민국 사람들의 피에서 길러지고 있을 것이다. 삶을 옥죄고 분리와 차별, 격리를 강제하는 신자유주의와 거대자본에 맞설 저항 유전자도 우리 몸속에 조금씩 자라고 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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