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을 잠시 접으신 거룩한 분들에게

연기 자욱한 주방. 열기 가득한 지옥. 온 몸의 근육과 온 몸의 기력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열사의 공간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던 당신들, 사흘이라는 짧은 투쟁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당신들. 앞으로도 당분간은 더 견뎌야 하는 당신들. 지켜질지 모르는 약속 한 마디에 너그러이 투쟁을 접고 아이들에게 돌아온 당신들. 이 땅의 어머니들. 당신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당신들을 존경합니다.

덜덜거리며 힘겹게 돌아가는 환풍기의 검은 날개와 그을음이 덕지덕지 묻어 ‘피카소의 추상화’가 그려진 희끄무레한 타일벽을 가끔씩 올려보며 당신들은 목 디스크 증세를 완화했지요. 마그마보다 뜨거운 불길이 당신들의 얼굴을 시나브로 익히고 화산재만큼이나 농밀한 검은 연기가 당신들의 코를 막고 단백질 타는 냄새가 폐암의 공포를 사정없이 흩뿌리는 그 저주의 공간에서 당신들은 그냥 하나뿐인 삶을, 하나뿐인 건강을 흔쾌히 내 주셨지요. 한겨울 비지땀이 가슴골에 개울물처럼 흐를 때, 주저앉고 싶어도 앉을 곳조차 없는 흥건한 바닥에는 퍽퍽하고 사나운 삶이 당신과 함께 흘렀지요.

최저임금에도 훨씬 미치지 못 하는 노동의 대가. 뻐개지는 어깨와 움직이기조차 힘든 손가락 근육. 휴가 한 번 가는 게 아예 불가능한 험악한 노동조건에도 당신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오셨지요. 오전 9시부터 푸성귀를 다듬고 생선의 비늘을 떨고 포기김치를 한 없이 썰고 한 가마의 쌀을 휘저어 뜨물을 쉬임 없이 흘려보내고 소시지 비닐을 벗기고 카레를 만드느라 당근을 깍둑 썰었지요. 기름이 펄펄 들끓는 가마솥 그악한 아가리에 오징어 다리를 튀기느라 어묵을 건지느라 두 손과 두 팔은 군데군데 화상을 입어 부풀고 짓무르고 쓰라렸지요.

▲ 박흥준 상임고문

그저 재잘거리며 밥 먹으러 몰려드는 병아리들이 귀여워, 밥 때만 기다리며 오전 수업을 지겹게 이겨낸 사춘기 아이들이 와르르 들이닥쳐 아귀아귀 먹어댈 때는 그냥 흐뭇해, 당신들은 노동의 고됨을 잠시 잊으셨지요. 밥 퍼 주고 국 떠 주고 반찬 얹어주고 “많이 먹어라” 한 마디에 장난기 그득하고 힘찬 “옛 썰!!” 소리가 돌아오면 힘든 시간이 언제 흘렀는지 몰랐지요. 그렇게 10년 그렇게 20년.

아이들이 맛있게, 즐겁게 먹은 뒤 올 때처럼 우르르 떠난 오후 1시. 잔반처리도 장난이 아니었지요. 그저 식판을 싹싹 비워주면 나는 보람 있고 너희들은 건강하고 모두가 좋으련만 집이나 매점이나 학교 앞 편의점이나 먹을 게 널려 있는 제반조건에 입맛조차 까다로운 우리의 아이들에게 ‘핥아놓은 개죽사발’처럼 허여멀쑥 밥그릇 비우기를 바라는 건 시대에 안 맞는 소망이었지요. 그런들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설거지 그릇은 산더미인데 잔반을 치우는 건 매우 손이 많이 가고 잔반통은 둘이 들기에도 힘들고 종량제 대형봉투에 하루 급식의 부산물과 쓰레기를 넣어 배출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하루가 가고 교감선생님에게 한 방 얻어맞아 입맛 떨어진 어느 30대 초반 선생님에게 오후 서너 시쯤 파 숭숭 썰고 계란 풀어 라면 한 그릇 끓여 낸 뒤 물청소를 깨끗이 하고 나면 어느덧 퇴근시간을 맞을 수 있었지요.

당신들은 계약직, 아니 비정규직. 다른 이름은 이름만 그럴 듯한 교육공무직.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떠맡고 있으나 노동공간은 이렇듯 열악하고 1년차나 10년차나 급여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이상한 쪽으로만 평등이 구현된 이 세상을 하지만 당신들은 별 불평 없이 살아왔지요. 그것은 불평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침묵이었지요. 안으로만 삭이던 긴 세월에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가슴 한 켠에 앙금처럼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래서 일어섰지요. 노동해방을 외치셨지요. 7월의 뙤약볕도 익히 겪어오던 마그마의 열기에는 미치지 못 했기에 별다른 문제는 되지 않았지요.

사흘 만에 종료된 투쟁. 길었던 기다림 끝에 억지로 만든 해방공간은 너무도 짧았지요. 조금은 허무했지요. 그래도 예전의 투쟁과는 다른 점이 있었지요. 사뭇 달라진 주변의 반응을 본 것만 해도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임금이 언제 찔끔 오를지, 이름만 바꾼 정규직조차 언제 될지 아직은 모든 게 의심스러운 상황이지만 당신들은 튜울립 한 송이 건네는 교장선생님의 격려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셨지요. 아이들의 포스트잇 한 조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지요. “사랑해요 힘내세요” 앙증맞은 저 글씨들은 내가 퍼준 밥을 먹고 나도 모르는 사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의 작품이었지요. 깨물어주고 싶은 그 녀석들의 마음이었지요. 눈물이 그렁그렁, 먹먹하지 않을 도리가 있었겠습니까.

노동존중을 표방하는 정부가 촛불로 타올라 드디어 우뚝 섰을 때 당신들은 희망을 보았지요. 하루의 노동이 너무 힘들어 촛불현장에는 나가보지 못 했지만, 혹시나 어찌 될지 두려워 의사표현을 자제했지만, 그래서 약간은 미안했지만 희망을 준 건 고맙기 짝이 없었지요. 그런데 그 촛불정부를 향해 투쟁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촛불정부가 반환점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아랫목 온기는 윗목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바란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그저 일할 힘이 있는 동안에는 해고의 공포를 겪지 않아도 되는 세상.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남편 흉을 저마다 보고, 깔깔거리며 용서하고, 가끔은 유행가 한 자락 흥얼거리며 즐겁게 일하는 게 일상적으로 가능한 세상. 나의 노동으로 우리 식구 세 끼 밥을 무사히 넘기고 드라마 한 편 편안한 마음으로 보며 어린 자식 보습학원 끊지만 않으면 만족할 수 있는 세상, 그런 소박한 세상만 바랐지요.

많이 배우고 많이 받아가는 사람들이 장악한 국회, 그저 놀기만 하는 국회, 될 듯 될 듯 흉내만 내다가 그냥 넘어가버리는 국회, 그 엉터리 국회에 한 번 더 기대를 걸어 볼까요. 예산이 없으면 당신들의 임금은 오르려야 오를 수 없는데 올 가을 그들은 예산안에 뭉텅뭉텅 칼질을 또 한 번 할 터이고 쪽지예산이 또 한 번 난무할 터. 그 기대는 아마도 난망일 겁니다. 교육예산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교부금이 거의 100%여서 말이 자치단체이지 교육청은 국회나 의회의 은혜 없이는 옴치고 뛰지도 못 합니다. 내년을 장담하기 어렵다는 얘기이지요. 당신들이 투쟁을 사흘 만에 접은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한 번 더 견디는 일 말고는 없는데 그러다가 촛불의 임기가 끝나기 십상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마침 내년이 총선이지요?

그래도 세상은 조금씩 달라지나 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언감생심 튜울립 한 송이 기대할 수 있었습니까. 학부모들의 아우성을 견딜 수나 있었습니까. 저 하이에나 같은 보수언론의 맹폭에 살아남을 수나 있었습니까. 대다수 학부모들이 흔쾌히 도시락을 쌌던 지난 사흘입니다. “그냥 밥 하는 아줌마”라고 망언을 내뱉었던 이언주가 더 이상 힘을 잃고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지 밥 먹으러 오는 데가 아니”라고 개념 없는 말을 서슴없이 뇌까리던 홍준표 같은 인간도 더 이상은 없습니다. 힘내십시오. 이 땅의 어머니들. 촛불정부 3년차. 시나브로 꺼져가는 촛불 속에서 이번에 저는 모처럼 당신들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촛불을 살리려는 노력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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